분류 전체보기208 서산에서 『흘러간, 놓아준, 그러므로 남은』 – 조용히 머무는 풍경 충남 서산은 조용한 도시입니다. 소란한 중심지보다는 오래된 절과 읍성이, 붉은 노을과 간간이 부는 바람이 먼저 기억에 남는 곳이죠. 장석주의 『흘러간, 놓아준, 그러므로 남은』은 지나간 시간과 남겨진 마음의 층을 말없이 꺼내 보여주는 산문집입니다. 이 책과 서산의 풍경은 자연스레 겹쳐집니다. 소리 없는 감정과 오래된 장면이 시간의 감각을 채우는 공간. 이번 여행은 말보다는 침묵에 가까운 시간을 따라 걸었습니다. 책과 도시가 함께 무르익는 계절 속으로.1. 간월암 – 바다 위에 놓인 고요간월암은 물때에 따라 길이 열리고 닫히는 작은 암자입니다. 육지에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짧은 순간, 그 바위 위 건물은 세상의 소리와 단절된 듯한 인상을 줍니다. 마루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면, 바람과 물결이 들려주는 리듬.. 2025. 4. 23. 파주에서 『책의 정신』 – 문장이 도시가 되는 곳 파주 출판도시를 걷다 보면 도시의 구조 자체가 하나의 문장처럼 읽힙니다. 질서 있는 길, 외벽마다 새겨진 출판사 로고, 그리고 책의 제목으로 명명된 건물들. 이곳 파주 출판 단지는 건물의 집합이 아니라, 책을 위한 도시입니다. 박웅현의 『책의 정신』은 이 출판도시에서 잉태되었고, 그 안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책을 책답게 만드는 것에 대한 깊은 질문과 태도, 생각의 방식이 이 도시와 비슷하리만큼 닮아 있습니다. 여느 관광지와는 다른 감도의 여행. 파주에서는 ‘읽는 행위’가 곧 ‘걷는 행위’가 됩니다.1. 지혜의 숲 – 시간의 두께를 품은 서가지혜의 숲은 파주 출판도시의 상징 같은 장소입니다. 천장을 가득 채운 책장이 길게 이어지고, 누구든 조용히 앉아 책을 펼칠 수 있습니다. 이 공간에는 수많은 사람의 .. 2025. 4. 23. 문경에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황현산의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짧은 문장 하나에도 삶의 무게가 실려 있었고, 그 말들이 들려주는 침묵의 뉘앙스는 오히려 더 큰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나는 문장을 따라 걷게 되었고, 자연스레 ‘길’이라는 단어에 오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문경을 떠올렸습니다. 조선 시대 과거길이자 지금은 걷기 좋은 옛길로 불리는 문경새재. 과거의 발자국과 오늘의 사유가 공존하는 이곳에서, 나는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의 문장을 품고 걸어보고 싶었습니다.1. 문경새재 – 걷는다는 것의 의미문경새재는 단순한 산길이 아닙니다.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시간의 틈새를 걷는 일이기도 합니다.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지나가던 길, 수많은 삶의 이야.. 2025. 4. 22. 단양에서 『누나』 – 아련한 감정의 시작을 따라 걷다 하일지의 『누나』는 기억의 조각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어린 시절의 풍경, 알 수 없는 감정, 다다를 수 없는 그리움. 모든 것이 덧없고 선명하게 그려지죠. 소설 속 단양은 그 모든 것의 무대였습니다. 나는 그 단양을 이 책과 걷고 싶었습니다. 수년 전, 주인공이 품었던 아련한 감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풍경은 변했겠지만, 감정의 기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단양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억을 따라가는 여정이자, 나의 내면을 다시 마주하는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어쩌면 나 역시 말하지 못한 감정을 조금은 꺼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1. 도담삼봉 – 흐릿한 사랑의 시작소설 속 '누나'를 향한 감정은 시작과 동시에 끝을 향해 가고 .. 2025. 4. 22. 남원에서 『혼불』 남원은 이야기가 오래 머무는 땅입니다. 깊고 느린 강물이 흐르고, 사람들의 숨결이 낮은 지붕 아래 조용히 머뭅니다. 나는 『혼불』을 읽고 이곳에 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최명희의 문장은 땅과 사람, 시간과 기억이 엉킨 채로 삶을 직조합니다. 소설 속 사라져 가는 전통의 집과 여인들의 삶은 한 시대의 문턱에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왠지 지금의 남원과 겹쳐 보였습니다. 다정하지만 단단하고, 아름답지만 아득한 그 감정. 나는 남원에서 그 감정의 결을 따라 걷고 싶었습니다.1. 광한루원, 전설이 머무는 정원남원의 심장 같은 광한루. 여기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릅니다. 누각 위로 바람이 스치고, 연못에는 은은한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혼불』 속 주인공 역시 이런 정원의 기운 속에서 나고 자랐을지.. 2025. 4. 21. 남영에서 『서랍 속의 집』 서울 한복판, 이름조차 조용한 동네 남영.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을 지나칩니다. 용산의 북적임과 숙대 앞의 활기 사이에서, 남영은 마치 시간에서 잊힌 것처럼 존재합니다. 나는 그 조용함에 이끌렸습니다. 김혜진의 『서랍 속의 집』을 읽으며 떠올린 풍경이 꼭 남영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아파트, 금이 간 계단,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은 이름들. 이 소설은 기억과 공간이 어떻게 얽히는지를 조심스럽게 보여줍니다. 남영을 걷고 싶었던 이유는, 그 서랍 속 누군가의 집이 혹시 여기 있을까 싶어서였습니다.1. 붉은 벽돌집, 오래된 집의 흔적남영역을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들이었습니다. 철길 근처의 낮은 담벼락, 낡은 주택가, 그리고 군데군데 붙은 부동산 전단지들. 『서랍 속의 집』의 배경이.. 2025. 4. 21. 이전 1 2 3 4 5 6 7 8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