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서산에서 『흘러간, 놓아준, 그러므로 남은』 – 조용히 머무는 풍경

by s-dreamer 2025. 4. 23.

서산 관련 이미지

충남 서산은 조용한 도시입니다. 소란한 중심지보다는 오래된 절과 읍성이, 붉은 노을과 간간이 부는 바람이 먼저 기억에 남는 곳이죠. 장석주의 『흘러간, 놓아준, 그러므로 남은』은 지나간 시간과 남겨진 마음의 층을 말없이 꺼내 보여주는 산문집입니다. 이 책과 서산의 풍경은 자연스레 겹쳐집니다. 소리 없는 감정과 오래된 장면이 시간의 감각을 채우는 공간. 이번 여행은 말보다는 침묵에 가까운 시간을 따라 걸었습니다. 책과 도시가 함께 무르익는 계절 속으로.

1. 간월암 – 바다 위에 놓인 고요

간월암은 물때에 따라 길이 열리고 닫히는 작은 암자입니다. 육지에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짧은 순간, 그 바위 위 건물은 세상의 소리와 단절된 듯한 인상을 줍니다. 마루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면, 바람과 물결이 들려주는 리듬이 마음속을 비워냅니다. 『흘러간, 놓아준, 그러므로 남은』의 한 구절처럼, “버려서 가벼워진다.” 간월암은 그 가벼움을 몸소 느끼게 해주는 장소입니다. 오래된 기와와 염주 소리, 파도와 나무 그늘. 그 모든 것이 오래된 문장의 어미처럼 조용히 끝을 맺습니다.

간월암은 단순히 풍경이 아름다운 사찰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다 위에 존재하는 시간이자, 감정을 비우는 공간입니다. 바다에 길이 잠겨 있는 시간 동안 암자는 혼자 남아 있고, 물이 빠진 시간에만 길이 열려 사람을 맞이합니다. 그 사이의 고요함은 세상의 어떤 소리도 닿지 않는 진공처럼 느껴집니다. 암자 안에 앉아 있으면 자신이 잠시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이 들 것만 같습니다. 장석주가 말한 “머무르지 않아 남겨지는 것들”이 이곳에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다만 흘러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간월암은 그런 무심함 속에서 위로를 건네고 있습니다.

2. 해미읍성 – 시간은 흘러도 돌은 남는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군사 요새였던 곳입니다. 높지 않은 성벽과 나무 사이로 걷다 보면, 역사의 흔적이 바람을 타고 다가옵니다. 오래전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공간은 그것을 말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장석주는 “시간은 묻히고, 돌은 남는다”고 썼습니다. 해미읍성은 그런 문장을 몸소 증명하는 곳이었습니다. 발밑의 자갈, 성곽의 이끼, 창 너머 들리는 새소리. 그 모든 것이 말보다 더 오랜 기억을 품고 있었습니다.

해미읍성의 성곽을 따라 걷는 동안, 돌담 위로 햇빛이 조용히 떨어졌습니다.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공간은 오히려 시간이 더 오래 남는것 같습니다. 해미읍성은 오랜 전란과 처형의 역사를 지닌 장소이지만, 지금은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아이들이 성 안에서 뛰어놀고, 나무 아래서 쉬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그러나 그 평온 속엔 기억이 스며 있겠죠. 장석주는 기억은 고요하게 스며들 때 가장 오래간다고 썼습니다. 이 성도 그러했습니다. 역사가 설명되지 않아도,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감각이 처럼, 이끼가 낀 성벽과 나무 사이의 냄새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 서산마애삼존불 – 바위에 새겨진 표정

백제 시대의 불상이 남아 있는 곳. 서산마애삼존불은 크지 않지만, 그 표정은 무척이나 큽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그러나 말하지 않는 듯한 그 얼굴. 조용한 산 중턱, 깎이지 않은 바위에 새겨진 자국들. 장석주는 “침묵이 말을 대신할 때 문장은 가장 깊어진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이 그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람이 부는 틈, 햇빛이 닿는 균열 속에서 불상의 표정은 시간보다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서산마애삼존불 앞에 서면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집니다. 화려하거나 거대하지 않음에도, 불상의 표정에는 긴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돌에 새겨진 표정은 부드럽고도 깊었습니다. 눈을 감은 듯, 미소를 머금은 듯한 그 얼굴은 말을 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메시지를 품고 있었습니다. 장석주가 말한 “사람을 감싸는 온화한 침묵”이라는 표현은 이 불상에 퍽이나 어울렸습니다.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는 동안, 문장이 사라지고 감각만이 남는 듯했습니다.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감정이, 말 없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4. 팔봉산 – 계절의 곡선을 따라 걷다

서산 팔봉산은 높은 산이 아니지만, 다채로운 풍경을 품고 있습니다. 길지 않은 오르막, 그리고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논과 바다. 가을빛이 스며든 산길을 걷다 보면, 계절이라는 시간의 호흡이 느껴집니다. 『흘러간, 놓아준, 그러므로 남은』은 하나의 계절을 통째로 삼킨 듯한 문장들로 가득합니다. 팔봉산의 능선을 걷는 시간은, 그 문장들을 하나하나 되새기기에 충분했습니다. 빠르지 않은 걸음, 짧은 숨, 그리고 나무 그늘 아래의 고요. 산도 책처럼 읽히는 순간이었습니다.

팔봉산 능선은 조용한 계절의 곡선처럼 느껴졌습니다. 높지 않은 경사와 정돈된 오솔길, 그리고 중간중간 바위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조용히 말을 건네었습니다. 정상에 올라서면 멀리 바다가 보이고, 고요한 논이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장석주의 문장처럼, 팔봉산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느끼게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풍경과 닮는다는 말처럼, 걷는 동안 내 감정도 산의 리듬을 따라 천천히 다듬어져 갔습니다. 빠른 숨 대신 깊은숨이, 소음 대신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그 산을 완성해 놓았습니다.

흘러간 시간 위에 놓인 감각

서산은 어떤 풍경도 강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대신 서서히, 조용히, 오래 머물다 갑니다. 『흘러간, 놓아준, 그러므로 남은』이라는 제목처럼, 지나간 감정과 장면들이 우리 안에 오래 남을 수 있도록 만듭니다. 이곳에서 무언가를 새로이 발견하기보다, 이미 알고 있던 감각을 다시 꺼내게 됩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그 위에 놓인 풍경과 문장은 우리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게 서산은, 지나간 계절을 조용히 붙잡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서산은 누군가에게는 낯선 도시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조용한 도시는 말없이 자신을 열어주고 기다립니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그곳에 머물며, 오래된 벽을 만지고, 바다를 바라보고, 돌의 온도를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흘러간, 놓아준, 그러므로 남은』이 그랬듯, 서산도 어떤 장면은 말보다 느리게, 그러나 깊게 남깁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책장을 다시 넘겨보았습니다. 읽은 문장과 걷던 길이 겹쳐집니다. 마애삼존불의 침묵은 책 속의 한 단락이 되었고, 간월암의 바람은 문장 끝의 여백이 되었습니다. 서산에서 보낸 시간은 어떤 특별한 여행보다 조용히 사유하며 오래 남아 있을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계절이 바뀌어도, 풍경이 변해도, 이 도시가 품은 감도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흘러가되 잊히지 않는 어떤 것처럼. 서산은 그렇게 우리 안에 남아 가겠죠.

기억은 멀어질수록 조용해지고, 조용할수록 더 선명해지니까요. 서산에서의 시간도 그럴 것 입니다. 그렇게 흘러간 것들이 놓아지고, 그 자리에 무언가가 남는 것. 그 무언가는 서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