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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서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 여름 안쪽의 정적 김민정의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는 더운 여름, 일상 속에서 문득 벌어질 수 있는 비일상을 다룹니다. 이야기 속의 공간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장소이지만,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분위기가 뒤바뀝니다. 조용한 골목, 오래된 건물, 그리고 식은 커피처럼 남겨진 시간들. 그런 배경과 나주는 묘하게 겹치는 느낌이 듭니다. 낮게 깔린 기와지붕, 낮은 담장 뒤로 이어지는 골목길,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든 이 도시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나주는 거창한 설명 없이, 그 자체로 장면을 형성합니다.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속 세계와 닮은 분위기는 도시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1. 나주곰탕거리 – 익숙함 아래의 불편한 온도곰탕거리는 나주의 대표.. 2025. 5. 2.
부여에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백제권』 부여는 내게 오래된 기억처럼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삶이 오고 간 자리, 그 자취는 흙 속에도, 물속에도 남아 있었습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백제권』을 들고 부여에 도착한 날, 나는 이 도시가 단지 ‘유적의 도시’만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사라진 왕국의 숨결이 남아 있었고,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그 위에 자연스레 겹쳐져 있었습니다. 나는 부여의 시간을 걷기 위해, 그리고 그 속에서 내 삶의 온도를 다시 재기 위해, 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1. 정림사지 – 완벽하게 불완전한 아름다움부여의 중심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곳은 정림사지였습니다. 5층 석탑은 그 자체로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단순히 ‘잘 지어진 .. 2025. 5. 2.
안동에서 『소년이 온다』 안동은 조용한 도시입니다. 바람조차 낮은 소리로 스쳐 지나가는 듯한 골목, 오래된 기와지붕 아래 무너진 기억들. 나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어쩐지 안동이 떠올랐습니다. 광주라는 장소에서 벌어진 일들이 안동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고요 속에 남겨진 감정의 결이 닮아 있었습니다.소설은 상처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감정, 눈빛에 남아 있는 고통, 기억을 감싸 안고 살아가는 삶. 그 모든 게 안동이라는 도시와 어딘가 통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주하고 싶었습니다.1. 병산서원, 시간이 기억하는 곳낙동강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병산서원은 단순한 유교 교육기관이 아니었습니다. 넓은 마당과 툇마루, 비스듬히 기운 지붕 아래로 빛과 바람이 스며들었습니다. 『소.. 2025. 5. 1.
순천에서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순천을 향한 여행은 계획보다 직감에 가까웠습니다. 피로가 조금씩 쌓여가던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났다. ‘기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 그 말이 곧 이 책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유지혜의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는 수많은 위로의 말보다 조용하고 단단한 한마디로 마음을 움직이는 책입니다.복잡한 감정들을 단정히 정리해 주는 글들 속에서 나는 자주 멈춰 서곤 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순천을 찾았습니다. 풍경이 말없이 위로하는 도시. 단순한 풍경에 감정이 잠기고, 느리게 걷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 순천은, 기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도시였습니다.1. 순천만 갈대밭 – 비워내야 보이는 것들순천만 갈대밭을 걷기 시작한 건 오후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햇살이 길게 누운 갈대.. 2025. 5. 1.
거제에서 『연년세세』 거제도의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바닷바람과 함께 황정은의 소설 『연년세세』 속 목소리들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여행은 단순한 풍경 감상이 아니었습니다. 책과 함께 떠나는 거제도에서 나는 두 개의 세계가 겹쳐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해안과 언덕, 그리고 마음속에 스며든 소설의 장면들이 서로를 비추며 울림을 주었습니다.전쟁의 상흔을 품은 땅과 고요한 바다, 그리고 그 위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천천히 교차합니다. 『연년세세』에 담긴 침묵과 애도의 정서가 이 섬의 공기와 어우러져, 여행의 순간들은 마치 소설의 연장선처럼 다가왔습니다. 나는 거제의 풍경 곳곳에서 소설 속 인물들의 숨결을 느끼고, 그들이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자연의 속삭임으로 들었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책 .. 2025. 4. 30.
목포에서 『흰』 한강의 『흰』은 읽는 이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말보다 여백이 더 많은 책, 설명보다 감각이 먼저 다가오는 문장들. 그 문장들을 품고 목포를 찾았습니다. 바다와 산, 골목과 폐선이 공존하는 도시. 무엇보다 '시간'이 서린 공간. 『흰』이 말했던 많은 단어들 ― 눈, 뼈, 소금, 상복, 유백 ― 그 모든 흰 것들이 목포라는 도시의 풍경 안에서 불현듯 떠오를 것 같았습니다. 이 여행은 사라진 것들과 남은 것들, 그리고 그 사이에 깃든 감정들을 따라가는 조용한 순례와도 같았습니다.1. 유달산 – 희미해지는 것들에 대한 예의유달산은 생각보다 낮고 조용한 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정상에 올랐을 때 내려다보이는 목포 앞바다와 항구는 묵직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흰』은 그런 공간에 어울리는 책이었습니다... 2025.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