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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소년이 온다』

by s-dreamer 2025.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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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은 조용한 도시입니다. 바람조차 낮은 소리로 스쳐 지나가는 듯한 골목, 오래된 기와지붕 아래 무너진 기억들. 나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어쩐지 안동이 떠올랐습니다. 광주라는 장소에서 벌어진 일들이 안동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고요 속에 남겨진 감정의 결이 닮아 있었습니다.

소설은 상처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감정, 눈빛에 남아 있는 고통, 기억을 감싸 안고 살아가는 삶. 그 모든 게 안동이라는 도시와 어딘가 통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1. 병산서원, 시간이 기억하는 곳

낙동강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병산서원은 단순한 유교 교육기관이 아니었습니다. 넓은 마당과 툇마루, 비스듬히 기운 지붕 아래로 빛과 바람이 스며들었습니다. 『소년이 온다』 속에도 마루에 엎드린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눕던 바닥, 스며들던 햇살은 그 자체로 안식이자 고통이었습니다. 병산서원의 고요함은 소설 속 죽음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의 숨을 품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서원 구석 그늘에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마음 깊숙이 무너진 곳을 손으로 어루만지듯, 서원이 조용히 나를 감쌌습니다. 

병산서원 마루에 앉아 한참 낙동강을 바라보았습니다. 정면의 낙동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소년이 온다』 속 마루에 누운 소년들의 이야기는 단지 죽음이 아니라, 그 이후의 침묵과 애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병산서원도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태어나고, 사라지고, 남겨졌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고요함은 무게였고, 그 무게는 오래된 돌기둥과 기와 위에 스며 있었습니다. 나는 그 위에 가만히 등을 기대었습니다. 한 문장이 내 안에서 떠올랐습니다. “기억은 없던 일을 되살리는 게 아니라, 잊히지 않게 하는 일이다.”

2. 하회마을, 이어지는 존재들

하회마을 골목을 걸었습니다. 조용한 흙길과 담벼락, 무너진 담장 틈새에서 자라는 들풀 하나까지도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습니다. 『소년이 온다』의 인물들은 누구 하나 제대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회마을은 사람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픈 기억도, 평범한 일상도. 죽음을 부정하지 않되, 그 곁에 살아 있음을 놓지 않는 방식. 마치 그들의 삶이 ‘계속된다’는 것 자체로 무언가를 증명하는 듯했습니다. 나는 하회마을에서, 이 소설의 ‘소년’이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회마을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정답고 평화롭게 웃고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 웃음소리는 경쾌했지만, 어쩐지 뒷맛이 아렸습니다. 『소년이 온다』 속 인물들도 그렇게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갑작스레 무너진 일상, 지워지지 않는 기억. 하회마을의 흙담과 나무 울타리는 그 시간을 품고 있는 듯했습니다. 마치 이 마을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잊지 않기 위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것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껴집니다. 나는 진흙 바닥에 남겨진 발자국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나의 발자국을 살며시 겹쳐 보았습니다.

3. 도산서원, 말해지지 않은 말들

이황의 정신이 깃든 도산서원은 말의 무게를 아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품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소년이 온다』에서 가장 큰 고통은 침묵입니다. 말할 수 없고, 말해도 닿지 않는 감정. 도산서원의 책 더미와 고요한 방 안에서 나는 소설 속 그 침묵들을 떠올렸습니다. 목소리가 되어주지 못한 어른들, 외면한 사회, 끝내 이야기로 쓰지 못한 기억들. 도산서원은 그런 침묵을 고요히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그 방에 앉아 있었습니다. 듣는 것조차 두려웠던 감정이 서서히 나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도산서원의 어느 방, 아무도 없는 공간, 소리가 사라진 시간 속에서 나는 『소년이 온다』 속 문장들을 되뇌었습니다. “말하지 않음이 죄가 될 수 있을까.” 침묵은 때때로 방어였고, 때로는 방조였습니다. 도산서원은 지혜와 품격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 고요함 속에서 말하지 못한 것들, 외면했던 것들, 침묵으로 흘려보낸 감정들을 마주했습니다. 기억은 늘 말로만 남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침묵으로도 오래도록 누군가를 슬프게 할 수 있다는 걸, 나는 그 공간에서 느꼈습니다.

4. 월영교, 이어짐의 다리

해질 무렵 월영교에 섰습니다. 붉은빛이 강물 위에 스며들고, 나무다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품습니다. 『소년이 온다』는 끝이 없다는 점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입니다. 과거는 끝나지 않았고, 기억은 무너진 채 현재를 흔듭니다. 하지만 월영교는 그런 기억들을 천천히 이어주는 다리 같았습니다. 망각으로의 다리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길로의 다리. 나는 그 다리 위에서 오래도록 강물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엇도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 기억은 어쩌면 해결이 아닌 ‘함께 살아내는 일’ 일지도 모른다는 걸, 이 강물은 알고 있었습니다.

월영교는 사람들을 하나씩 강 건너로 데려다주는 다리였습니다. 그것은 단지 장소의 기능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리는, 누군가의 감정과 감정 사이를 잇는 통로 같았습니다. 『소년이 온다』가 그러하듯,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 상처 입고,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월영교 위를 걷는 발걸음은 마치 애도의 행렬처럼 느껴졌고, 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은 울음처럼 들렸습니다. 그 다리 위에서 나는 마음으로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기억하겠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겠지만.


안동에서 보낸 시간은 내 안에 남아 있던 감정의 덩어리를 조용히 꺼내는 여정이었습니다. 『소년이 온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주해야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 고통을 기억하는 일. 안동은 그런 기억을 묵묵히 품은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고요한 도시 안동은, 말하지 않고도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소년이 온다』는 끝내 위로받지 못한 이야기였지만, 안동의 조용한 공기 속에서는 그 이야기의 여운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모든 상처가 치유되진 않아도, 기억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버텨낼 수 있다는 믿음. 나는 그 믿음을 안고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고요함은 무심함이 아니라, 깊은 애도의 형식일 수 있다는 걸 이 도시가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애도는 곧 삶을 다시 살아내는 방식이라는 것도. 안동은 그렇게, 말없이 위로를 건네는 도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