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의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바닷바람과 함께 황정은의 소설 『연년세세』 속 목소리들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여행은 단순한 풍경 감상이 아니었습니다. 책과 함께 떠나는 거제도에서 나는 두 개의 세계가 겹쳐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해안과 언덕, 그리고 마음속에 스며든 소설의 장면들이 서로를 비추며 울림을 주었습니다.
전쟁의 상흔을 품은 땅과 고요한 바다, 그리고 그 위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천천히 교차합니다. 『연년세세』에 담긴 침묵과 애도의 정서가 이 섬의 공기와 어우러져, 여행의 순간들은 마치 소설의 연장선처럼 다가왔습니다. 나는 거제의 풍경 곳곳에서 소설 속 인물들의 숨결을 느끼고, 그들이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자연의 속삭임으로 들었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책 속 문장과 현실의 풍경이 한데 녹아들며 가슴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1. 거제 포로수용소 – 침묵의 기억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들어서자 적막한 공기가 주변을 감쌌습니다. 녹슨 철조망과 붉게 바랜 벽돌 잔해들이 오랜 세월의 상처를 증언하듯 서 있었습니다. 한때 수만의 포로들이 웅성거렸을 공간이 지금은 고요합니다. 그 침묵은 마치 말 못 할 사연을 가슴 깊이 묻은 사람의 침묵과 닮아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연년세세』 속 이순일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전쟁 통에 가족을 잃고 피난길에 올랐던 그녀는 살아남은 자의 숙명처럼 묵묵히 하루하루를 견뎌냈을 것입니다. 총성과 비명이 가득했을 과거 속에서 그녀가 붙잡았던 것은 오직 희망의 끈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내 아이들이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철조망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 마치 지나간 세월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합니다. 침묵은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들이 모여 이루는 침묵의 무게를, 이곳에서 나는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 무거운 정적 속에서도 한 줌의 빛처럼 남아 있는 희망—이순일이 꿈꾸었던 평온한 내일—이 잿빛 기억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나는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2. 구조라 해변 – 파도에 띄우는 애도
구조라 해변의 모래사장을 거닐었습니다. 잔잔한 물결이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며 발목을 감쌌습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은 낮은 숨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듯합니다. 나는 그 소리를 애도의 언어로 들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을 바다가 대신 품어주는 듯한 느낌.
한영진의 얼굴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녀는 장녀로서 가족을 일으켜 세우느라 자신의 눈물을 뒤로 감춘 인물입니다. 가정을 돌보고 가게를 꾸리느라 누구보다 강인해 보였던 그녀지만, 남몰래 가슴에 쌓인 슬픔이 얼마나 많았을까. 쓸쓸한 해변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면, 한영진 같은 이들이 가슴에 눌러 담았던 한 맺힌 눈물들이 천천히 흘러나와 바다로 스며드는 상상을 해봅니다.
파도는 밀물과 썰물로 해변의 흔적들을 지웠다가도 다시 새깁니다. 그것은 애도의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그리움도 때로는 밀물처럼 차올라 눈시울을 적시고, 다시 썰물처럼 가라앉습니다. 『연년세세』의 인물들이 겪은 상실과 슬픔 역시 이 바다 위에 조용히 떠올랐다가 흘러가고 있을 것입니다. 파도가 남기는 소금기 어린 내음 속에서 나는 애도의 눈물을 대신 흘려주는 바다의 너그러움을 느꼈습니다.
3. 바람의 언덕 – 이름 없는 이들의 속삭임
거제도 남쪽 끝자락, 바람의 언덕에 오르니 탁 트인 하늘 아래 풍차가 돌고 있습니다. 초록빛 언덕을 스치는 바람은 힘차면서도 쓸쓸한 소리를 냅니다. 풀잎들이 몸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한숨을 내쉬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몇몇 위대한 이름들을 기억하지만, 세상을 진짜 떠받치는 것은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평범한 삶들입니다. 『연년세세』는 바로 그런 이름 없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담아냅니다. 이순일과 한영진의 삶도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상처와 인내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전쟁과 가난, 시대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며 지나온 이들의 이야기는 외쳐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바람결에 실려 오는 속삭임을 들으며 한세진을 생각합니다. 그녀는 어머니와 외할머니 세대의 상처와 기억을 지켜보며 자란 인물입니다.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이름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세대를 넘어 그녀의 가슴에 가 닿았듯, 지금 이 순간 바람의 언덕을 스치는 바람 소리 역시 이전 시대의 울림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4. 외도 보타니아 – 연결된 상처에서 꽃핀 연대
외도 보타니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사방에 만개한 꽃들과 푸른 남해 바다가 함께 시야에 들어옵니다. 한때 바람만 가득하던 바위섬이 이제는 삶의 아름다움이 만발한 정원이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빛깔의 꽃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풍경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연년세세』 속에서 한세진과 이순일 이모의 손녀가 이어받은 지난 세대의 이야기는 그들의 삶을 연결해 주었습니다. 말로 전해진 기억과 상처를 통해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일에게서 한영진에게, 다시 한세진에게로 이어진 상처들은 그렇게 다른 누군가의 공감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얻습니다.
외도의 정원을 거닐다 보면, 나무뿌리들이 얽혀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상처 입은 뿌리가 섬 전체에 생명을 퍼뜨리듯, 우리 인간의 아픔도 서로의 연대로 이어질 때 새로운 삶의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 조심스레 믿어봅니다.
연년세세, 우리가 서로를 잇는 시간
거제에서 마주한 풍경과 『연년세세』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감정으로 포개집니다. 그것은 바로 '연대'입니다. 포로수용소의 침묵 속에도, 해변의 애도에도, 언덕의 바람에도, 정원의 꽃들에도 연대의 흔적이 스며 있었습니다. 세대를 넘어 기억을 나누는 행위가 모두 연대의 다른 얼굴임을 깨닫습니다.
침묵하던 상처에 누군가의 공감이 닿을 때, 그 상처는 의미가 되고 위로가 됩니다. 애도의 눈물이 메말랐던 자리에 새로운 희망의 씨앗이 돋아나고, 이름 없던 삶들도 서로를 비추는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연년세세, 해를 거듭하여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고통과 사랑은 이렇게 연대로 승화되어 갑니다. 저 먼 과거의 숨결부터 지금 내 곁의 온기까지, 우리 모두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엮여 있음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