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나주에서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 여름 안쪽의 정적

by s-dreamer 2025. 5. 2.

나주 이미지

김민정의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는 더운 여름, 일상 속에서 문득 벌어질 수 있는 비일상을 다룹니다. 이야기 속의 공간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장소이지만,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분위기가 뒤바뀝니다. 조용한 골목, 오래된 건물, 그리고 식은 커피처럼 남겨진 시간들. 그런 배경과 나주는 묘하게 겹치는 느낌이 듭니다. 낮게 깔린 기와지붕, 낮은 담장 뒤로 이어지는 골목길,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든 이 도시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나주는 거창한 설명 없이, 그 자체로 장면을 형성합니다.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속 세계와 닮은 분위기는 도시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1. 나주곰탕거리 – 익숙함 아래의 불편한 온도

곰탕거리는 나주의 대표적인 관광 코스지만, 그 일상성 속에도 흥미로운 단면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같은 국물을 우려내는 풍경은 안정감보다는 반복이라는 느낌에 더 가깝습니다.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가 보여주는 세계 역시 그렇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 반복된 풍경 속에서 기묘한 균열이 일어납니다. 곰탕거리의 식당 간판은 대체로 오래되고 비슷한 서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사성과 차이 사이에 놓인 이 거리의 분위기는, 맛의 기억을 되짚는 동시에 어떤 기시감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여름의 더위가 퍼지는 낮 시간, 식당 안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지만, 밖의 거리 풍경은 정적입니다. 그 뜨거운 공기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혼자 길을 걷는 사람의 실루엣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습니다.

2. 금성관 – 권위가 남은 자리에 침묵이 깃들다

금성관은 한 시대의 행정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광장처럼 펼쳐진 앞마당은 텅 비어 있고, 기둥의 균형은 완벽하지만 그 위를 지나는 사람은 드뭅니다.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의 배경 중 공공기관의 빈 사무실, 무대에서 사람만 빠진 연습실 같은 공간들이 떠오릅니다. 금성관의 정적은 단순한 보존 상태 때문이 아닙니다. 권위라는 개념이 사라진 이후, 그 자리에 어떤 감정도 남지 않은 채 잔재만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카롭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온도. 방문객은 이곳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조차 혼란스럽습니다. 그런 애매함이 이 공간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3. 나주향교 – 바닥에 쌓인 먼지처럼 남은 이야기

향교는 도시의 외곽처럼 느껴지는 조용한 동네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대성전 앞의 마당은 여전히 단정하지만, 그 단정함이 과거의 질서로부터 이어졌다는 점에서 낯선 기분이 듭니다. 문이 닫힌 교실, 나무로 된 기둥, 바닥에 고인 그림자들.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에서 주요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들처럼, 향교도 설명 없이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걷다 보면 설명을 찾기보다는 그 빈 공간을 채우는 바람과 소리를 듣게 됩니다. 관광지로서의 향교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다만, 구조와 형태로만 존재합니다. 이는 독자에게 구체적인 사건을 제시하지 않고 감정만을 남기는 소설과 닮았습니다.

4. 영산포 – 강과 기차, 그리고 멈춘 시간

영산포는 과거 나주의 경제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은 조용하고, 지나간 시간의 흔적만이 남아 있습니다. 자전거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옛 간이역 느낌의 건물과 폐쇄된 철도 신호기가 등장합니다.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에서는 한 장면, 한 문장이 낡은 감각을 끄집어냅니다. 영산포의 풍경은 그러한 소설적 구조와 닮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지만,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존재합니다. 벤치에 놓인 빈 음료 캔, 잡초가 자란 선로, 강 위를 흐르는 정적. 그것들은 의도하지 않은 무대 세트처럼, 자연스레 배경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풍경은 설명 없이 이야기를 유도합니다. 영산포는 질문을 던지지 않지만, 방문객은 자꾸만 그 의미를 상상하게 됩니다.


결론 – 설명되지 않아도 성립하는 분위기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는 서사의 구멍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스터리를 해소하려 하기보다, 모호한 결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나주 역시 그러합니다. 역사적 설명이 부족한 장소들, 방치된 듯한 골목, 그리고 비워진 공간들. 이 도시는 친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친절하지 않기에 더 오랫동안 풍경이 머리에 남습니다. 누군가의 시선이 닿지 않아도 성립되는 장면들. 그런 공간은, 언젠가 이야기가 태어날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나주의 여름은, 그렇게 소설적인 여운만을 남깁니다.

곰탕거리로 다시 돌아오는 길, 익숙한 간판들 사이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래된 식당의 유리창엔 증기가 차 있고, 밖은 여전히 후텁지근합니다. 그 더위 속에서 무언가 일어났다는 상상을 멈추기 어렵습니다. 그런 도시가 나주입니다. 이 도시는 특별한 사건을 제공하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서 독자가 마음대로 각색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줍니다. 김민정의 소설처럼, 구체적인 결말이 없어도 완결되는 이야기. 나주는 그런 이야기의 무대가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금성관 뒤편 작은 길을 따라 걸으면 담쟁이넝쿨이 벽을 타고 오르고 있습니다. 철제 창살 사이로 빛이 비칩니다. 역사는 더 이상 이곳에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멈춘 자리에 놓인 구조물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뭔가를 말하려 합니다. 나주는 그런 식으로, 문학적 상상력을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실제가 아닌 허구로 연결될 수 있는 공간.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는 바로 그런 공간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향교 옆 좁은 언덕길을 따라 내려오면, 더 이상 안내판도 없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공간과 침묵뿐. 말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곳이 있고, 보여주지 않아도 분위기가 존재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고요한 날,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던 여름. 그 여름 한복판에서, 도시와 소설이 겹쳐지는 순간을 목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