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흰』은 읽는 이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말보다 여백이 더 많은 책, 설명보다 감각이 먼저 다가오는 문장들. 그 문장들을 품고 목포를 찾았습니다. 바다와 산, 골목과 폐선이 공존하는 도시. 무엇보다 '시간'이 서린 공간. 『흰』이 말했던 많은 단어들 ― 눈, 뼈, 소금, 상복, 유백 ― 그 모든 흰 것들이 목포라는 도시의 풍경 안에서 불현듯 떠오를 것 같았습니다. 이 여행은 사라진 것들과 남은 것들, 그리고 그 사이에 깃든 감정들을 따라가는 조용한 순례와도 같았습니다.
1. 유달산 – 희미해지는 것들에 대한 예의
유달산은 생각보다 낮고 조용한 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정상에 올랐을 때 내려다보이는 목포 앞바다와 항구는 묵직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흰』은 그런 공간에 어울리는 책이었습니다. 한강은 흰색이라는 단어를 통해 죽음과 삶, 슬픔과 기원의 흔적을 조용히 얘기합니다. 유달산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며 나는 그중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눈은 모든 걸 덮고, 다시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 바다는 그런 눈과도 닮았습니다. 담고 있지만 발설하지 않는 성질. 나는 그 침묵의 언어를 산 위에서 오래도록 느끼고 있었습니다.
유달산의 바람은 다정했고, 그 다정함은 침묵과 닮아 있었습니다. 말을 걸지 않지만 곁을 지키는 방식. 정상에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머물렀습니다. 아래로는 항구가, 멀리로는 섬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흰』 속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말하지 못한 마음’이었습니다. 사랑, 슬픔, 상실, 다짐. 그 모든 감정은 흰 바탕 위에 수없이 새겨졌다 지워지는 기록처럼 느껴졌습니다. 목포의 풍경은 그런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습니다. 소리 내지 않아도 그 자리에 머무는 감정. 나는 그 침묵을 천천히 감싸 안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2. 서산동 시화골목 – 기억이 남은 자리
서산동 시화골목은 오래된 시가 벽에 적혀 있는 좁은 골목입니다. 발자국 소리조차 낯설 만큼 조용한 길. 『흰』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상복'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단순한 옷이 아니라, 한 존재가 사라진 이후에도 남겨진 자리를 지키는 단어였습니다. 골목 곳곳의 시구들 속에는 누군가의 이야기, 누군가의 상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골목을 걸으며 내 안에 떠나보낸 존재들을 떠올렸습니다.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잊히지 않는 얼굴. 시와 문장이 서로를 감싸는 골목에서, 나는 흰 글씨처럼 흐릿하지만 분명한 감정을 되새겼습니다.
시화골목을 걷다 보면 벽에 새겨진 시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건 바닥의 그림자입니다. 하루가 저물 무렵, 골목은 한 겹의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흰색은 빛이자 잔존입니다. 존재는 사라져도 그것을 기억하려는 마음은 남겨져있습니다. 『흰』 속 ‘상복’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죽은 이를 위한 옷이자, 남겨진 자를 위한 의식. 나는 그 골목을 지나며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던 한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아직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은, 혹은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는 사람. 시의 언어와 흰색의 공기, 그 둘이 겹쳐지며 내 안의 감정에 명징한 형체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3. 목포근대역사관 – 흰색으로 씌워진 역사
근대역사관은 외관부터 중후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이곳은 사라진 시간의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한강이 『흰』에서 보여준 방식처럼, 이 역사관 또한 말보다 ‘남은 기운’이 더 강했습니다. 누군가의 통증, 누군가의 기억, 그리고 더는 말할 수 없는 것들. 전시를 보는 동안 나는 한참을 멈춰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흰 천’으로 가려진 진실 같은 장면 앞에서. 『흰』 속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떠올랐습니다. “사라진 존재가 남긴 것은 어떤 결이다.”
목포의 역사도, 이곳의 공기 속에서 그러한 결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목포의 역사 또한 말보다 체온에 가까웠습니다. 한 시대가 지나고, 많은 이름들이 잊혔지만, 그 기운은 여전히 공간 속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침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말로 남기지 못한 역사야말로 더 깊게 새겨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껴안는 일. 그것이 이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4. 갓바위 –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
갓바위는 이름 그대로, 갓을 쓴 형상의 두 바위가 나란히 서 있는 곳입니다. 바다를 마주한 그 바위 앞에서 나는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흰』을 읽으며 계속해서 떠올렸던 ‘소금’이라는 단어. 눈물과 닮은 그것은, 갓바위 앞에 선 바다의 짠내와도 이어졌습니다. 이곳은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조용히 머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사라진 것을 기억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어떤 이는 말로, 어떤 이는 침묵으로. 나는 이 바람 부는 자리에서 ‘기억한다는 것’이 결국 남겨진 이들의 몫임을 다시 실감했습니다. 바람은 부드럽고 단호하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갓바위 앞바다를 바라보다가 흰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히는 장면을 오래도록 지켜봤습니다. 그 순간, 『흰』 속 ‘소금’이라는 단어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눈물은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금물이죠. 아픔은 그렇게 침묵을 먹고 자라나는 것 같습니다. 갓바위에는 노부부가 앉아 조용히 손을 맞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뒷모습이 소설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말없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위로. 흰색은 투명하지만 결코 빈 색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남겨진 이들의 기도와 침묵,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풍경을 눈에 담고, 오래도록 마음에 묻었습니다.
결론 – 흰 빛으로 이어지는 마음
목포에서의 하루하루는 사라짐의 기록을 되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흰』은 단어들을 통해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그려냅니다. 그리고 목포는 그 단어들이 살아 숨 쉬는 공간 같았습니다. 유달산의 바다, 시화골목의 시, 역사관의 침묵, 갓바위의 바람. 모든 곳이 '흰' 감정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결. 나는 그 결을 따라 걸었고, 여행이 끝날 무렵 남은 것은 고요하고 단단한 울림이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목포는 흰빛처럼, 조용히 마음에 남았습니다. 목포는 그렇게, 많은 것을 전하는 도시였습니다. 떠난 것과 남은 것, 잊힌 것과 기억된 것. 흰빛의 여백 속에서, 나는 조용히 내 마음의 무늬를 다시 새겨보았습니다. 이 도시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깊은 예의를 지키고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내 삶의 일부를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