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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에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by s-dreamer 2025. 4. 22.

문경새재 이미지

황현산의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짧은 문장 하나에도 삶의 무게가 실려 있었고, 그 말들이 들려주는 침묵의 뉘앙스는 오히려 더 큰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나는 문장을 따라 걷게 되었고, 자연스레 ‘길’이라는 단어에 오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문경을 떠올렸습니다. 조선 시대 과거길이자 지금은 걷기 좋은 옛길로 불리는 문경새재. 과거의 발자국과 오늘의 사유가 공존하는 이곳에서, 나는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의 문장을 품고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1. 문경새재 – 걷는다는 것의 의미

문경새재는 단순한 산길이 아닙니다.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시간의 틈새를 걷는 일이기도 합니다.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지나가던 길, 수많은 삶의 이야기가 쌓인 그 길 위를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황현산의 문장처럼, “길은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우리를 이끌기도 한다.” 그 말처럼 나는 방향을 정하기보다, 발걸음에 몸을 맡겼습니다. 새소리, 바람 소리, 흙냄새. 모두가 내 안의 속도를 늦추게 만들었습니다. 자연과 함께 걷는다는 것. 그것은 삶을 다시 정돈하는 일임을 문경새재는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문경새재의 옛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길이 곧 글이 되고 숨결이 문장이 되는 느낌이 듭니다. 황현산의 글처럼, 걷는 동안 무언가 말할 수 없던 것들이 천천히 언어가 됩니다. 계곡 옆 평상에 앉아 있던 노부부의 웃음소리, 산바람이 흔드는 나뭇잎, 중간중간 멈춰 선 사람들의 눈빛까지. 나는 이 길 위에서 세상의 많은 장면이 글이 되기 전의 모습으로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2. 석탄박물관 – 사라진 시간과 사라지지 않은 기억

문경의 석탄박물관은 어릴 적 기억 속 ‘검은 광부들’의 이미지와 닿아 있습니다. 사라진 산업, 닫힌 광산의 풍경. 하지만 그곳엔 여전히 누군가의 삶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황현산의 글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의”를 담고 있었다면, 이곳은 그 예의가 실체화된 공간이었습니다. 나는 박물관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작업복, 갱도 모형, 낡은 헬멧. 하나하나가 기억의 파편처럼 마음에 박혀오는 듯했습니다. 문장은 종종 사라진 것을 불러오고, 그 문장을 따라 우리는 감정의 층위를 내려갑니다.

석탄박물관의 어두운 갱도 모형 앞에서 나는 문득, 이 공간을 지나간 무수한 삶을 상상했습니다. 단순히 산업의 흔적이 아니라, 그 안에서 웃고 울며 살았던 이름 없는 얼굴들. 황현산의 산문에는 언제나 구체적인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는 ‘익명의 사람들’에게도 이름을 불어넣었습니다. 나 역시 그 발자취를 따라, 묵직한 공기의 진동을 느끼며, 문장이 아니라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문경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장소보다 사람이, 이야기보다 삶이 더 큰 인상을 남기는 곳.

3. 점촌 시장 골목 – 일상의 중얼거림

점촌의 시장 골목은 다른 관광지와 달리 ‘꾸밈없는 일상’이 남아 있었습니다. 장바구니를 든 노인들, 가게 앞을 지키는 고양이, 그리고 어설픈 손글씨 간판. 황현산은 “삶은 종종 우연과 생략으로 이루어진다”라고 했습니다. 그 문장이 골목 곳곳에서 떠올랐습니다. 아무 말 없이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때론 말보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의 결을 이곳에서 느꼈습니다.

점촌 골목에서 만난 어느 오래된 카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1980년대 가요. 사장님의 느릿한 말투와 창밖의 가게 셔터, 건너편의 빈 의자까지. 나는 황현산이 말한 ‘시간의 결’이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의 글은 속도를 재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느림’이 가진 존엄을 말해줍니다. 그 카페에 앉아 나는 몇 페이지를 소리 내어 읊어보았습니다. 낡은 단어 속에 새로이 피어나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지금 이 골목에 스며든,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과 닮아 있었습니다.

4. 토끼비리 – 낯선 아름다움 앞에 머물다

문경의 토끼비리는 조용하고 낯설었습니다. 절벽 아래 강물이 흐르고, 물비늘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습니다. 이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황현산의 산문은 ‘머묾’의 아름다움을 말해줍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것보다, 잠시 멈춰 바라보는 일이 때론 더 큰 울림과 감동을 줍니다. 나는 강가에 앉아 한참을 글도 쓰지 않고, 사진도 찍지 않았고 그저 있었습니다. 생각하고, 숨 쉬고, 머물렀습니다.

그 시간이 마음에 어떤 결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얼거리지 않아도 문장이 쌓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연은 언제나 앞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 대신 존재로 감정을 전합니다. 문경의 풍경도 그랬습니다. 조용한 강가에서 나는 말하지 않고 남는 여운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결론 – 길 위에서 다시 마주한 나

문경의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나는 내 안의 속도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는 말보다 여운이, 더 큰 힘을 가진다는 걸 알려주었습니다. 문경의 풍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남는 것들. 사라져도 여운으로 남는 공간들. 나는 그 길 위에서 나를 다시 만났고, 내가 잊고 있던 무거운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문경새재 입구로 돌아왔습니다. 긴 길을 걸은 후의 발은 무겁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벼웠습니다. 황현산은 “길은 걷는 동안 그 사람의 생각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휘어진다”고 했습니다. 문경의 길은 내 마음의 구부러진 선들을 천천히 펴 주었습니다. 그 선들 사이사이로 빛이 들었고, 침묵이 깃들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한 문장, 한 숨, 한 걸음마다 삶이 있었습니다.

문경의 바람은 조용하지만 깊었습니다. 그 바람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음속에서 오래 묻어두었던 단어들이 하나둘 떠오릅니다. 황현산의 글을 품은 이 여행은, 어느 순간부터 목적지가 사라진 여정이었습니다. 나를 위한 길, 나만의 중얼거림이 되어준 시간. 나는 이 길 끝에 서서, 이제는 잊지 않아도 되는 감정을 배웠습니다.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은 마음. 문경의 모든 길은 결국 내 안으로 이어졌고, 나는 그 길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