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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에서 『서랍 속의 집』

by s-dreamer 2025. 4. 21.

서울 남영 관련 이미지

서울 한복판, 이름조차 조용한 동네 남영.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을 지나칩니다. 용산의 북적임과 숙대 앞의 활기 사이에서, 남영은 마치 시간에서 잊힌 것처럼 존재합니다. 나는 그 조용함에 이끌렸습니다. 김혜진의 『서랍 속의 집』을 읽으며 떠올린 풍경이 꼭 남영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아파트, 금이 간 계단,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은 이름들. 이 소설은 기억과 공간이 어떻게 얽히는지를 조심스럽게 보여줍니다. 남영을 걷고 싶었던 이유는, 그 서랍 속 누군가의 집이 혹시 여기 있을까 싶어서였습니다.

1. 붉은 벽돌집, 오래된 집의 흔적

남영역을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들이었습니다. 철길 근처의 낮은 담벼락, 낡은 주택가, 그리고 군데군데 붙은 부동산 전단지들. 『서랍 속의 집』의 배경이 눈앞에 펼쳐진 듯한 기분이 듭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살던 집의 ‘이름 없는 기억’을 마주합니다. 남영의 골목을 걷는 순간 역시 그랬습니다. 이름을 몰라도 알 것 같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 그 속에서 나는 내가 살던, 혹은 살았을 수도 있었던 집을 상상했습니다. 삶은 결국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감정이 쌓여가는 일이라는 걸 이곳에서 다시 깨닫습니다.

2. 철길 옆을 따라 걷는 시간

남영의 철길은 아직도 기차가 다닙니다. 도심 한가운데서 철길 소리를 듣는 건 묘한 경험입니다. 『서랍 속의 집』 속 주인공처럼, 나도 그 소리를 들으며 잠시 걸음을 멈췄습니다. 철길은 단절을 상징하기도 하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통로이기도 하죠. 소설이 그러했듯, 남영도 나에게 과거의 흔적을 꺼내보게 만들어 주는 곳이었습니다. 낡은 철도 옆을 걷는 내 발걸음은 마치 누군가의 기억을 밟고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남겨진 구조물,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그림자들. 이 모든 것이 말없이 시간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3. 비어 있는 집, 채워지지 않는 감정

남영에는 유독 빈집이 많습니다. 누군가의 흔적이 남은 채 비워진 창틀, 낡은 커튼, 문턱에 남겨진 낙서. 『서랍 속의 집』이 보여주는 슬픔은 그런 장면들과 닮아 있습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 빈집 앞에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웃었을지도 모를 사람, 싸웠을지도 모를 가족, 혹은 조용히 이사를 준비했을 사람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소설 속 집처럼, 이 집들도 누군가에게는 고요한 전쟁터였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서랍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고, 그 안엔 꺼내지 못한 집이 들어 있습니다.

4. 언덕 위의 커피 한 잔

남영역 뒤편엔 작은 언덕이 있습니다. 그 위엔 오래된 다방을 개조한 카페가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서랍 속의 집』 마지막 장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도시의 소음이 멀리 들리고, 햇빛은 천천히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습니다. 김혜진의 문장은 날카롭지만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이 박히는 것 같았죠. 나는 커피를 마시며 이 공간과 소설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겉으론 평범하지만, 속엔 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얽혀 있는 곳. 남영은 그런 동네였습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서울 속에서도, 여전히 기억을 품고 서 있는 몇 안 되는 공간 중 하나.


 

그날 남영역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내 삶에도 ‘서랍 속의 집’ 같은 공간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겉으론 평범했지만, 수많은 기억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 방, 그 방에 남겨진 감정의 조각들. 김혜진의 소설은 그 공간을 너무도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남영의 골목들을 걷는 동안, 나는 그 소설 속 인물의 감정을 빌려 과거의 나를 마주했습니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위로였습니다. 비어 있음이 때론 가장 큰 충만함일 수 있다는 걸, 이 동네의 침묵이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남영은 말이 없지만 그 침묵이 더 깊은 소리를 전합니다. 낡은 간판 아래 오래된 포장마차가 불을 밝히고, 허름한 건물 벽엔 오래된 이름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그건 이 동네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바뀌는 것들 속에서도 바뀌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어쩐지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서랍 속의 집』은 그 느린 변화, 혹은 변하지 않음의 의미를 조용히 되새기게 만듭니다. 그저 흘러가지 않고, 조용히 남겨두는 선택. 그 안에 진짜 이야기가 있다는 걸 이 소설은 알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집이라 부르는 것들은 모두 마음의 한 귀퉁이를 닮아 있는 건 아닐까.

작고 어둡고 때로는 낡았지만, 결코 쉽게 버릴 수 없는 공간.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때때로 아프고 무겁지만, 결국 나를 이루는 조각들입니다. 남영의 오래된 주택가를 지나며, 그 조각들을 하나씩 만져보았습니다. 그것은 되돌아봄이자, 새로운 이해의 시작인 듯합니다. 『서랍 속의 집』 속 주인공이 자신의 공간을 마주했던 것처럼, 나 역시 이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나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남영을 걷게 될 때면, 오늘의 이 감정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소설 한 권과 함께 이 동네를 걷고, 그 동네가 내 마음속 오래된 방 하나를 열게 만들었던 이 기분과 감정을.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서랍 속에 오래된 집을 품고 살아갑니다. 잊은 줄 알았던 공간, 멀어진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날 때, 그것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축복입니다. 김혜진의 문장은 그 축복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남영의 골목도 그 문장처럼 조용히 말을 걸었습니다.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서랍 속의 집』은 이미 여러 번 덮였다가 다시 펼쳐진 책입니다. 다시 읽을 때마다 다른 문장이 마음에 박히는 이유는, 내가 계속 달라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의 나는 남영을 걷는 사람이고, 어쩌면 다음번엔 그 골목 어귀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도시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감정을 놓치지 않는 삶. 그 조용한 결심이 내 안에서 오래도록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이따금 우리는 그 장소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뒤늦게 깨닫습니다. 남영은 그런 동네가 될 것 같습니다. 거창한 명소가 없어도,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아도, 묵묵히 감정을 건네는 곳. 나는 그 골목의 그림자들 속에서 위로받았고, 멀어졌던 나 자신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던 것 같습니다. 삶은 그렇게, 조용한 곳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남영과 『서랍 속의 집』은 내게 그런 시작을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며 다시 그 골목을 걷고 있습니다. 계단을 오르며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던 햇살, 벽면에 잔잔히 퍼진 담쟁이, 낡은 창틀 사이로 흘러나오던 음악. 모든 것이 특별하지 않아 더 깊게 남습니다. 『서랍 속의 집』은 그런 평범한 순간들을 특별하게 기억하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집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서랍 속에 조용히 담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풍경을 더 잘 기억하고 싶습니다. 더 많이 느끼고, 더 자주 멈춰 서고 싶습니다. 그 감정들이 바로, 삶이라는 집의 진짜 모양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