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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에서 『혼불』

by s-dreamer 2025. 4. 21.

남원 이미지

 

남원은 이야기가 오래 머무는 땅입니다. 깊고 느린 강물이 흐르고, 사람들의 숨결이 낮은 지붕 아래 조용히 머뭅니다. 나는 『혼불』을 읽고 이곳에 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최명희의 문장은 땅과 사람, 시간과 기억이 엉킨 채로 삶을 직조합니다. 소설 속 사라져 가는 전통의 집과 여인들의 삶은 한 시대의 문턱에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왠지 지금의 남원과 겹쳐 보였습니다. 다정하지만 단단하고, 아름답지만 아득한 그 감정. 나는 남원에서 그 감정의 결을 따라 걷고 싶었습니다.

1. 광한루원, 전설이 머무는 정원

남원의 심장 같은 광한루. 여기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릅니다. 누각 위로 바람이 스치고, 연못에는 은은한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혼불』 속 주인공 역시 이런 정원의 기운 속에서 나고 자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통은 지금도 낡지 않은 채 머물러 있었습니다. 나는 그 정자에 앉아 책의 몇 문장을 떠올렸습니다. 고운 말씨와 고요한 눈빛으로 살아가던 인물들. 그들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머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광한루원의 정적은 마치 그 시절을 증언하는 듯했습니다.

광한루의 연못에 비친 나무 그림자와 고요한 물결을 바라보다 보면, 소설 속 인물들이 무채색의 한복을 입고 그 연못 옆을 지나는 상상이 절로 듭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한 정원은, 오히려 흐르는 것의 본질을 더 잘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혼불』은 흐르는 것 속에서도 지켜야 할 정신,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끝내 붙들어야 할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다. 광한루는 그런 이야기의 한 자락이었습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소설의 문장들을 중얼거렸습니다. “사람의 일생은, 그 사람의 말에 다 있다.” 남원에서 나는 말보다 풍경이 먼저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풍경은 곧 말이 되었습니다.

2. 실상사, 절망 속의 고요

『혼불』의 배경 중 하나인 실상사. 남원에서도 한참 떨어진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이 절은, 세속으로부터 멀어진 만큼 더욱 가까이 감정을 품습니다. 오래된 기와, 담쟁이로 덮인 돌담, 그리고 절 안에 울리는 목탁 소리.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었습니다. 최명희는 『혼불』에서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수많은 단어를 갈무리했다 합니다. 이 절의 침묵도 마치 그렇게 쌓인 것 같았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외면했던 감정들, 말하지 못한 진실들이 이 고요함 속에 함께 머물러 있는 듯했습니다.

실상사의 고요함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무너진 것들 위에 세워진 평화였다. 『혼불』 속 인물들이 짊어진 슬픔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바람은 천천히 계곡을 타고 내려왔고, 절벽 아래 묵은 기왓장 위로 햇살이 스며들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오래된 시간을 상상했습니다.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 말로 다 담기지 못한 정서들이 공기 중에 머무는 공간. 실상사는 그저 종교의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억을 품은 감정의 집처럼 느껴졌습니다. 최명희가 언젠가 이곳에 머물며 수없이 고쳐 썼을 장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3. 요천, 흐름과 사라짐의 미학

남원을 가로지르는 요천은 작고 조용하지만, 그 물길엔 오랜 세월이 흐릅니다. 『혼불』 속 여인들의 삶처럼 이 강도 때론 잠잠하고, 때론 급했습니다. 나는 강가에 앉아 물결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도시는 흘러가고 있지만, 사라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이 강이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지나가게 만들지만, 그 흔적은 어딘가 남아 있습니다. 『혼불』은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원은 그 기록이 조용히 살아 숨 쉬는 도시였습니다.

요천 강물은 유난히 투명했습니다.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그 물결에 손을 담갔습니다. 물은 흘러가지만, 그 물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혼불』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떠안은 숙명, 그 무게를 이 강은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여전히 굽이굽이 흐르면서도, 어느 지점에서는 멈춘 듯 고요한 표정을 짓습니다. 강은 이야기의 은유였다. 흘러가는 속에서 붙들리는 것. 이 여행이 끝나더라도, 그 물결 하나하나가 내 안에 남을 것임을 나는 알았습니다. 사라지는 것이 모두 잊히는 건 아니니까요.

4. 최명희 문학관, 말의 무게를 다시 배우다

남원 시내에 자리한 최명희 문학관. 나는 그곳에서 『혼불』의 육필 원고를 처음 마주했습니다. 고요한 필체, 반복된 문장, 지워진 낱말들. 그녀는 말을 너무 사랑해서 쉽게 쓰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문학관 안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벽면에 적힌 구절들을 천천히 읽어  보았습니다. “말은 사람의 삶을 품어야 한다.” 『혼불』은 그렇게 태어난 이야기였습니다. 남원을 걷는 일은, 그 이야기의 현장을 따라가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최명희 문학관의 조용한 전시실을 걷다 보면 작가를 대면하는 시간이 됩니다. 벽에 쓰인 수많은 육필 메모들과 수정 흔적. 작가는 단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기록자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혼불』을 완성하기까지 17년, 그 모든 세월이 문장마다 겹겹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녀가 썼던 말의 무게는 곧 삶의 무게였습니다. 나는 책의 처음과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고, 이 도시의 슬로우한 호흡을 그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말이 머무는 곳, 시간이 배어 있는 공간. 문학관은 단지 작가를 기리는 장소가 아니라, 독자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었습니다.


남원에서의 하루는 마치 오래된 꿈같았습니다. 이곳은 이야기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기억하고, 되새기고, 품고 있었습니다. 『혼불』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어떤 감정은 말보다도 더 오랜 시간, 더 많은 풍경 속에 스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도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집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남원의 공기와 소설의 문장이 내 안에 남아 삶의 리듬을 조금 더 천천히 바꿔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남원을 떠나는 길, 기차 안에서 『혼불』의 한 구절을 다시 펼쳤습니다. “그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말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 말은 꼭 남원을 두고 한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도시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남아 있는 것들, 드러내지 않아 더 깊은 것들. 나는 그 조용한 감정의 깊이를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남원은 사라진 이야기가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은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남원에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문을 열고, 눈을 떴습니다. 삶은 결국 수없이 반복되는 출입의 기록이고, 『혼불』은 그 모든 문 앞에서 멈춰 선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돌아가는 길 위에서 나는 다짐했다. 더 천천히 걷자고. 더 오래 기억하자고. 남원이 내게 준 이야기는, 그런 삶의 자세였습니다. 그 느린 태도가 언젠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나는 믿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