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의 『누나』는 기억의 조각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어린 시절의 풍경, 알 수 없는 감정, 다다를 수 없는 그리움. 모든 것이 덧없고 선명하게 그려지죠. 소설 속 단양은 그 모든 것의 무대였습니다. 나는 그 단양을 이 책과 걷고 싶었습니다. 수년 전, 주인공이 품었던 아련한 감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풍경은 변했겠지만, 감정의 기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단양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억을 따라가는 여정이자, 나의 내면을 다시 마주하는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어쩌면 나 역시 말하지 못한 감정을 조금은 꺼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도담삼봉 – 흐릿한 사랑의 시작
소설 속 '누나'를 향한 감정은 시작과 동시에 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도담삼봉을 바라보며 그 애틋함을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강물 위에 떠 있는 세 개의 바위는 마치 거리감의 상징처럼 느껴졌습니다. 가까운 듯 멀고, 닿을 듯 닿지 않는. 주인공의 마음이 꼭 그랬을 것 같습니다. 누나를 바라보지만 다가갈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감정. 도담삼봉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자리에 앉아 바람을 느끼며 그 모습을 눈에 담아보았습니다. 바람이 불고, 물결이 잔잔히 흐르며, 나 역시 누군가를 생각했던 것도 같습니다. 전하지 못했던 마음, 머릿속에서만 반복되는 장면들. 사랑은 그렇게 조용히, 기억 속에 스며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그 시절의 나를 도담삼봉이 대신 기억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았던 첫 감정, 자각조차 어려웠던 마음의 떨림. 도담삼봉의 고요한 풍경은 마치 오래전 마음속에 남겨진 정적과도 닮아 있었습니다.
2. 고수동굴 – 마음속 미로를 걷다
고수동굴은 빛이 닿지 않는 세계였습니다. 바깥의 햇살은 사라지고, 차가운 돌과 물방울만이 존재하는 공간. 나는 그곳에서 『누나』의 인물들이 숨긴 감정이 떠올랐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의 균열이 존재합니다. 어릴 적 감정은 단순하지만 동시에 복잡합니다. 말하지 못하고, 감추며, 스스로도 알 수 없어 헤매는 시기. 고수동굴의 미로 같은 통로는 그런 마음을 닮아 있었습니다.
손전등을 따라 걸으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 길의 끝에 빛이 있기를. 그리고 덮어두었던 감정도 언젠가 이해될 수 있기를. 동굴 속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말하지 못한 마음이 하나둘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둠 속을 걸으며 비로소 직면할 수 있는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고수동굴은 말없이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3. 읍내 골목 – 사라진 시간 위를 걷다
단양의 읍내는 조용했습니다. 작은 골목과 오래된 간판, 닫힌 상점들이 있는 풍경. 그 사이로 소설 속 배경이 겹쳐졌습니다.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누나를 따라갔던 장면, 함께 길을 걸으며 말을 아꼈던 순간들.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천천히 골목을 걸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떠나지만, 어떤 기억은 골목에 스며듭니다.
길 위에서 나는 오래된 감정을 되짚었습니다. 어쩌면 나도 그런 감정을 품고 자랐는지도 모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누나』가 말하지 않고도 전했던 이야기들이, 이 골목 위에서 나를 감싸 안았습니다. 문득 벽에 붙은 오래된 전단지 한 장에도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단양의 읍내는 지금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장소였습니다.
4. 퇴계공원 – 닿지 못한 마음이 피는 곳
단양에는 퇴계 이황과 기생 두향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공원 한쪽에 조용히 놓인 동상과 시비는 사람들의 사랑을 말없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누나』 속 사랑도 그랬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존재했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깊었습니다. 나는 퇴계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한 문장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감정. 닿을 수 없지만, 영원히 내 안에 머무는 사랑.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바람을 맞으며 오래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반드시 완성되거나 결실을 맺어야 의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책과 이 장소와 이 시간을 통해서 곱씹어보게 됩니다. 비록 과거의 감정이라 해도, 그때 진심이었던 마음은 여전히 현재의 나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결론 – 기억은 풍경 속에 머문다
단양을 걷는 내내 『누나』의 문장들이 속삭이듯 따라왔고 함께 걸었습니다. 말하지 못한 감정,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그리고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억. 그 모든 것이 풍경과 함께 진한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사랑은 때로는 도달하지 못한 거리에서 더 깊어집니다. 『누나』가 그랬고, 단양이 그랬습니다.
이번 여행의 키워드는 감정의 회귀였습니다. 오래된 기억과 다시 만나는 일. 나는 그 속에서 나의 어린 마음과 다시 마주했습니다. 단양은, 그 조용한 감정의 이름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 덕분에, 오늘의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