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파주에서 『책의 정신』 – 문장이 도시가 되는 곳

by s-dreamer 2025. 4. 23.

출판 관련 이미지

파주 출판도시를 걷다 보면 도시의 구조 자체가 하나의 문장처럼 읽힙니다. 질서 있는 길, 외벽마다 새겨진 출판사 로고, 그리고 책의 제목으로 명명된 건물들. 이곳 파주 출판 단지는 건물의 집합이 아니라, 책을 위한 도시입니다. 박웅현의 『책의 정신』은 이 출판도시에서 잉태되었고, 그 안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책을 책답게 만드는 것에 대한 깊은 질문과 태도, 생각의 방식이 이 도시와 비슷하리만큼 닮아 있습니다. 여느 관광지와는 다른 감도의 여행. 파주에서는 ‘읽는 행위’가 곧 ‘걷는 행위’가 됩니다.

1. 지혜의 숲 – 시간의 두께를 품은 서가

지혜의 숲은 파주 출판도시의 상징 같은 장소입니다. 천장을 가득 채운 책장이 길게 이어지고, 누구든 조용히 앉아 책을 펼칠 수 있습니다. 이 공간에는 수많은 사람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책의 정신』이 강조하는 ‘문장의 힘’은 바로 이런 곳에서 자연스럽게 전해집니다. 책은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서, 그 자체로 태도와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문장이, 아직 읽히지 않은 페이지들이 이 공간 안에 살아 숨 쉬는 것 같습니다. 조용하지만 밀도 있는 공간은, 걷는 사람에게도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유효합니다.

지혜의 숲에서는 책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수직으로 뻗은 책장은 높은 천장을 압도하고, 독자는 그 사이를 조용히 녹아들어 있습니다. 아이들과 어르신이 나란히 책을 읽고, 혼자 앉아 필사를 하는 이도 있습니다. 공간은 분리돼 있지만, 모두가 같은 문장을 공유하는 느낌이 듭니다. 『책의 정신』에서 강조하는 ‘읽기의 깊이’는 이곳에서 가장 잘 구현됩니다. 전시되지 않은 책들,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책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커피잔이나 음악보다 문장이 우선이 되는 이 풍경은, 지금 시대엔 오히려 낯선 방식의 사유인 듯합니다.

2.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 물리적 도서관을 넘어서

출판도시 한가운데 있는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는 책과 출판, 디자인에 관한 정보를 모은 복합 공간입니다. 겉보기엔 박물관처럼 정적인 장소지만, 내부는 회의실, 전시, 독서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책의 정신』에서 말하는 "콘텐츠 중심 사고"는 이곳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문장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필요한 것들. 그 모든 과정이 이 건물 곳곳에서 보입니다. 파주는 책의 결과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책이 만들어지는 시간과 시스템까지도 이 도시의 일부로 품고 있습니다.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의 전시실은 매번 주제가 바뀝니다. 최근엔 독립출판과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디자인과 문장의 접점, 책의 외형과 내면을 아우르는 주제들이 공간 곳곳에 배치됩니다. 박웅현은 책의 외면보다 내면에 주목하지만, 그 안을 전달하기 위한 형태 역시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센터에 비치된 전시 큐레이션 리플렛은 그 자체로 하나의 책과 같습니다.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도, 벽면에 붙은 한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히 사유의 밀도가 높아집니다. 이곳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의도와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3. 지지향 – 책과 밤이 공존하는 공간

지지향은 ‘책과 머무름’을 위한 공간입니다. 북스테이라는 개념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전부터, 이곳은 조용히 책과 여행을 연결해 왔습니다. 『책의 정신』에는 머무름의 태도에 관한 단상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읽고, 생각하고, 쉬어가는 시간. 지지향은 그 모든 것을 실현합니다. 창밖의 풍경은 심플하고, 실내는 독립적인 책상과 조명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호텔과 도서관의 경계에 놓인 이 공간은, 독서를 여행으로 확장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지지향에 머무는 밤은 조용하고, 대부분의 객실에 TV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책장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읽고, 누군가는 적고, 누군가는 창밖을 오래 바라봅니다. 『책의 정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느림’의 미학은 이곳의 밤에도 담겨 있습니다. 빠르게 읽는 것보다 오래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는 감각. 책장을 넘기다 멈추고, 창밖 나무 그림자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순간. 지지향은 그런 시간들을 허락합니다. 파주의 밤이 유독 고요한 이유는, 이 도시의 중심에 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4. 출판도시 산책 – 문장이 건축이 될 때

파주 출판도시를 단순한 상업 단지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건축은 전시나 상징보다 실용과 성찰의 산물입니다. 박웅현은 책에 대해 “속도가 아닌 방향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출판도시의 길을 걷다 보면, 각 건물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빛과 그림자를 나누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방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죠. 문장처럼 정돈된 도시, 그곳의 건축과 조경, 공간 배치는 모두 어떤 정신의 표현인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출판도시를 걷다 보면, 거리마다 다른 출판사의 간판이 눈에 띕니다. 『책의 정신』에서 박웅현은 “책은 콘텐츠다, 형식은 그다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출판도시의 구조에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건물들은 외형보다 내부 기능에 집중되어 있고, 간결한 재질과 형태로 표현됩니다. 지나치게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를 전할 수 있다는 원칙. 이곳의 건축은 말보다 조용한 설득으로 다가옵니다. 마치 하나의 문단처럼 길게 이어진 블록, 여백을 둔 광장,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게 만드는 보행자 중심의 설계까지, 모든 것이 책의 태도를 닮았습니다.


결론 – 말 없는 문장, 걷는 독서

출판도시의 가장 끝 지점에 도달하면, 고요한 강가와 마주하게 됩니다. 물 흐름은 느리고, 바람은 낮게 깔립니다. 도시의 분주함에서 조금 떨어진 이 공간은 책을 덮고 사유할 수 있는 마지막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책의 정신』이 말하는 본질에 다가가는 여정은 이처럼 길고 조용합니다. 거대한 슬로건이나 화려한 구조물이 없어도, 이곳은 책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파주 출판도시는 사람을 북돋우기보다 낮춥니다. 자신을 중심에 놓기보다, 문장을 중심에 두게 만듭니다. 『책의 정신』을 다시 펼치며 출판도시를 돌아보면, 책은 단순한 읽기의 대상이 아니라 사는 방식에 대한 힌트가 되곤 합니다. 느리고 깊게, 말을 아끼고 의미를 다져가며. 이 도시와 이 책은 그러한 태도를 함께 전합니다. 파주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도 하나의 문장처럼 자리하는 도시입니다. 말이 적어도 정신은 선명한 곳. 그곳이 바로, 책의 도시 파주였습니다.

출판도시를 빠져나오며 다시 돌아본 골목은 처음과는 다른 풍경인 듯한 느낌을 줍니다. 햇살에 따라 달라지는 색,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 그리고 건물 사이로 흐르는 공기의 질감. 그 모든 것이 책의 문장처럼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은 독서가 특별한 행위가 아닌, 일상 속에 녹아들 수 있게 해주는 곳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조금씩 조정해 나가는 일이죠. 그런 점에서 파주는 책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 그리고 그 정신을 유지하는 방식 자체가 특별한 곳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