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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이에서 『별을 쫓는 아이』 – 별과 시간을 품은 작은 도시 이시카와현, 서해를 향해 열린 작은 도시 하쿠이. 일본에서도 드물게 ‘우주의 도시’라 불리는 이곳은, 겉으론 조용하고 소박하지만 고개를 들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밤하늘은 인공조명의 간섭 없이 깊고 짙은 어둠을 머금고, 그 속에 수천, 수만 개의 별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하쿠이에는 별에 얽힌 전설이 오래전부터 내려오고, '우주 신사'라는 특별한 장소까지 존재합니다. 나는 신카이 마코토의 『별을 쫓는 아이』를 떠올리며 하쿠이의 하늘 아래를 걸었습니다. 별을 따라 잃어버린 것,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을 찾아 나섰던 소녀처럼, 나도 이곳에서 과거의 기억과 소망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습니다. 하늘은 말이 없지만, 별들은 조용히 이야기합니다. 사라진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쿠이는 그렇게, 별과 .. 2025. 5. 5.
오부세에서 『산문(三四郎)』 – 성장과 상실이 교차하는 조용한 마을 오부세는 작고 단정한 마을입니다. 전통 가옥과 밤나무 숲, 작은 미술관과 조용한 거리. 걷는 사람조차 드물어, 이곳에서는 생각이 소리처럼 들립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문(三四郎)』을 떠올리기엔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시골에서 도쿄로 올라온 청년 산시로가 겪는 세계와 현실, 그리고 이별의 감정. 오부세의 골목은 산시로가 느꼈던 세상의 이질감과 상실을 닮아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한때 어른이 되어야 했던, 그러나 아직 어른이 아니었던 우리의 마음을 다시 마주했습니다.1. 밤나무 골목 – 여물지 않은 마음의 산책오부세는 일본에서도 밤으로 유명한 마을입니다. 오래된 밤나무 숲을 따라 걸으며, 나는 산시로가 처음 도쿄의 거리를 걸었을 때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미래, 알 수 없는.. 2025. 5. 5.
김해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 – 조용한 길을 함께 걷다 김해의 아침 공기는 고요하고 차분합니다. 바쁜 도심의 소음 대신 오래된 시간의 숨결과 가만한 새소리만이 귓가에 맴돕니다. 김해의 이 조용한 아침 풍경은 마치 한 편의 서정시처럼 천천히 펼쳐집니다. 이른 시간의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의 모습도 많지 않아 한층 한산합니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이 어슴푸레 윤곽을 드러내고, 해반천 위로는 옅은 물안개가 피어오릅니다. 모든 것이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정지된 듯 잔잔한 이 도시의 분위기 속에서, 나는 김금희의 소설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지만 끝내 말하지 못한 감정들을 다룬 그 이야기. 책장을 덮었을 때 느꼈던 묵직한 여운이 김해의 정적인 풍경과 겹쳐 보이는 듯했습니다. 책과 여행을 접목한 이 연재의 마흔.. 2025. 5. 4.
경주에서 『숨결이 바람 될 때』 – 사유가 머무는 도시 경주는 고요하게 말을 건네는 도시입니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풍경은 무겁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습니다. 대릉원의 낮은 능선, 불국사의 계단, 석굴암으로 향하는 숲길은 모두 천천히 걸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는 그런 경주와 잘 어울립니다. 삶과 죽음, 의미와 시간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이 책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경주라는 공간에서 가볍지 않은 사유로 이끕니다. 이곳에서 걷는 모든 순간은 조용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1. 대릉원 – 삶의 무게가 눕는 자리대릉원은 수많은 왕과 귀족들의 능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능선 위로 흐르는 바람은 조용하지만 깊습니다. 그 아래엔 한 시대를 살아낸 누군가의 인생이 잠들어 있습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 2025. 5. 4.
남양주에서 『다산의 마지막 공부』 – 강가에서 되새긴 사유의 태도 남양주는 조용하지만 깊은 결을 지닌 도시입니다. 그중에서도 다산 정약용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지는, 사색과 배움의 공간으로서 오래도록 사랑받아 왔습니다. 조윤제의 『다산의 마지막 공부』는 그의 삶과 학문, 철학을 다시 조명하며,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한 인물이 쌓아온 정신을 삶 속으로 끌어오는 책입니다. 그런 면에서 남양주의 풍경은 이 책과 닮았습니다. 천천히 걷고 바라보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여행은 철학자가 남긴 사유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입니다.1. 다산 유적지 – 생각의 구조를 짓는 곳정약용 생가와 기념관, 다산 정원, 실학박물관이 한데 모여 있는 다산유적지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닙니다. 그곳은 생각의 근거지를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책에서.. 2025. 5. 3.
보성에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계절을 오래 품는 도시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한 계절의 감정과 공간, 기억을 고요하게 이어 붙인 산문집입니다. 느림의 미학, 풍경의 밀도, 감정의 결을 따라가는 이 책은 계절이 천천히 흘러가는 장소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성은 이 책과 잘 맞닿아 있습니다. 다원의 초록빛 경사면, 오래된 간이역, 고요한 바다. 계절이 쉬어가는 듯한 풍경은 마치 책 한 권이 펼쳐진 상태로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여름의 한가운데로 향해도, 서두르지 않는 곳. 보성은 그렇게 한 계절을 천천히 오래도록 품고 있습니다.1. 대한다원 – 초록이 응축된 풍경보성에 도착해 처음 들른 곳은 대한다원입니다. 계단처럼 층층이 쌓인 찻잎들은 그 자체로 풍경이자 질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찻잎이 흔들리고,.. 2025.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