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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에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계절을 오래 품는 도시

by s-dreamer 2025. 5. 3.

보성 이미지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한 계절의 감정과 공간, 기억을 고요하게 이어 붙인 산문집입니다. 느림의 미학, 풍경의 밀도, 감정의 결을 따라가는 이 책은 계절이 천천히 흘러가는 장소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성은 이 책과 잘 맞닿아 있습니다. 다원의 초록빛 경사면, 오래된 간이역, 고요한 바다. 계절이 쉬어가는 듯한 풍경은 마치 책 한 권이 펼쳐진 상태로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여름의 한가운데로 향해도, 서두르지 않는 곳. 보성은 그렇게 한 계절을 천천히 오래도록 품고 있습니다.

1. 대한다원 – 초록이 응축된 풍경

보성에 도착해 처음 들른 곳은 대한다원입니다. 계단처럼 층층이 쌓인 찻잎들은 그 자체로 풍경이자 질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찻잎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이 다시 산등성이를 따라 퍼져갑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문장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격렬하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조용히 스며드는 힘이 있습니다. 다원에서 바라본 초록은 시야를 가득 채우고, 그 색감은 머릿속에 오랫동안 잔상처럼 남습니다. 시간을 멈추지 않아도, 그 순간은 길게 이어질 듯합니다.

대한다원 초입에는 찻잎 향이 배어든 바람이 먼저 다가옵니다. 흙길을 따라 위로 걸어 올라가면, 발걸음마다 소리가 다르게 울립니다. 어느 지점에서는 발소리가 부드럽고, 어느 지점에서는 자갈 소리처럼 날카롭습니다. 이런 미묘한 변화가 풍경과 함께 감각에 각인됩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는 문장의 끝이 다음 문장의 시작처럼 이어집니다. 다원에서는 바람, 냄새, 색감, 그리고 사람의 기척조차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겹쳐집니다. 모든 것이 고요하게 이어지며, 초록의 진폭은 점점 깊어집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시간의 부피를 재게 됩니다.

2. 득량역 – 시간과 기차가 머문 자리

득량역은 지금도 기차가 멈추는 작은 간이역입니다. 목조 지붕 아래 벤치에 앉아 있으면, 긴 여행길의 한 장면에 놓인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이곳은 특별한 관광지가 아님에도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그렇듯, 설명이 필요 없는 감정이 있습니다. 득량역 앞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기찻길 옆으로 자라난 풀과 오래된 표지판이 시선을 끕니다. 모든 것이 낡았지만, 그 낡음이 그대로 풍경이 됩니다.

득량역은 작은 간이역이지만, 그 안엔 오래된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대합실 벽에 걸린 시계는 시간을 가리키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기차가 오기 전의 정적, 플랫폼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먼 길을 떠나는 여행자들. 이 모든 것이 소설 속 한 페이지처럼 정돈되어 있습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은, 불필요한 말을 덜어내고 본질만을 남기는 데 있습니다. 득량역 역시 그런 공간입니다. 많은 것을 말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는 감각. 오래된 시간의 공기가 지금도 이곳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3. 벌교 – 조용한 소리로 채워진 마을

벌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으로 더 유명한 동네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그저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들어선 골목이었습니다. 좁은 골목 안에는 시간이 고여 있었고, 간간이 들려오는 새 소리나 밥 짓는 냄새가 풍경의 일부처럼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는 자주 풍경이 감정을 앞서곤 합니다. 벌교의 거리도 그러했습니다. 어떤 감정이 따라오기 전에, 먼저 다가오는 것은 장면이었습니다. 오래된 간판, 닫힌 철문, 잔잔한 음악. 그 모든 것이 말을 걸지 않아도 충분했습니다.

벌교의 풍경은 일상에 가깝습니다. 새벽에는 문을 여는 가게가 있고, 오후에는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있으며, 저녁에는 골목마다 불빛이 켜집니다. 그 평범함이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세계에서는, 평범한 것들이 오랫동안 바라보게 되는 대상을 이룹니다. 벌교의 어느 골목에서는 폐점된 식당의 메뉴판이 그대로 걸려 있었고, 누구도 손대지 않은 책장이 햇살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기록은, 말보다 더 강한 울림을 남깁니다.

4. 율포해변 – 바다가 흘려보내는 여름

율포해변은 크지 않습니다. 대신 조용하고, 물결이 낮고, 해가 천천히 지는 곳입니다. 해변 끝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여름의 감각을 잘 보여줍니다. 바닷가에 앉아 있는 그 시간이, 책 한 권의 한 문장과 닮아 있었습니다. 무엇도 빠르지 않고, 무엇도 늦지 않은 여름. 그 여름은 아주 오래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율포해변에서 해가 질 무렵, 바다는 유리처럼 반짝였습니다. 밀려오는 파도가 아닌, 밀려왔다가 멈춘 파도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 파도를 한참 바라봤습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고, 바다는 그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속 문장은 짧지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율포해변의 풍경도 그랬습니다. 무언가를 억지로 감동시키려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함으로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감각은, 잊힌 듯하다가도 다시 떠오르는 여름의 단면처럼 남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순간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한 계절을 보내는 방식

보성은 많은 것을 보여주는 도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느끼게 만드는 도시입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처럼, 말보다는 장면이 앞서고, 감정보다는 시간이 먼저 흐릅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긴 여운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운이 계절을 조금 더 천천히 보내게 합니다. 보성은 여름의 끝자락에서 다시 펼쳐보고 싶은 책 같은 장소였습니다.

보성이라는 도시는 무엇을 말하지 않고, 무엇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찻잎이 자라는 방식처럼,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그런 공간에서 더 깊게 읽힙니다. 특정한 사건이나 감정 없이도 사람을 머물게 만드는 문장처럼, 보성은 자연스럽게 풍경과 감각을 내어줍니다. 여행의 목적은 어느새 사라지고, 남은 것은 장면과 공기, 그리고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뿐 입니다.

돌아오는 길, 기차 안에서 이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처음엔 그저 한 권의 산문집이었지만, 여행을 거친 후에는 마치 보성의 풍경이 묻어난 책처럼 느껴졌습니다. 문장과 장소가 서로를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순간. 그런 순간이야말로 여행이 끝난 뒤에도 오래 남습니다. 여름은 끝나더라도, 그 여름이 담긴 문장과 장소는 그렇게 마음속에 남아 있게 될 것 입니다. 보성은 그 여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해 줄 도시였습니다.

여름은 매번 비슷하게 오지만, 그 감각은 해마다 다릅니다. 어떤 해의 여름은 시끄럽고, 또 어떤 여름은 조용합니다. 보성에서의 여름은 후자였습니다. 모든 것이 절제되어 있고, 필요 이상의 장식은 없었습니다. 대한다원의 초록빛, 벌교의 바람, 득량역의 나무 냄새, 율포의 빛 바랜 파도. 그 하나하나가 과하지 않아서 더 마음에 남았습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처럼, 그 여름은 말을 아끼면서도 많은 것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렇게 그해의 여름은 보성에서 천천히, 오래도록 남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