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고요하게 말을 건네는 도시입니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풍경은 무겁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습니다. 대릉원의 낮은 능선, 불국사의 계단, 석굴암으로 향하는 숲길은 모두 천천히 걸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는 그런 경주와 잘 어울립니다. 삶과 죽음, 의미와 시간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이 책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경주라는 공간에서 가볍지 않은 사유로 이끕니다. 이곳에서 걷는 모든 순간은 조용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1. 대릉원 – 삶의 무게가 눕는 자리
대릉원은 수많은 왕과 귀족들의 능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능선 위로 흐르는 바람은 조용하지만 깊습니다. 그 아래엔 한 시대를 살아낸 누군가의 인생이 잠들어 있습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말합니다. “삶이 끝을 향해 달려갈 때 비로소 삶의 의미가 선명해진다.” 대릉원은 그런 사유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장소인 듯합니다. 능 앞에 서면, 그가 남긴 것은 이름이 아니라 시간이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고요한 풀숲에서 피어난다. 경주의 땅은 그런 질문을 넌지시 건넵니다.
대릉원 안을 걷다 보면 능 하나하나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누군가는 짧게 살았고, 누군가는 긴 세월을 누렸지만,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은 똑같습니다. 폴 칼라니티가 마지막까지 의사로 살아가려 했던 것처럼,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다움’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능 앞에서 마주한 나 자신은 지금 무엇을 좇고 있는가. 남기고 싶은 것은 물건이 아니라, 기억이나 태도 같은 것이 아닐까. 경주의 바람은 그 질문을 던지고, 대릉원의 고요한 곡선은 그 물음에 스스로 답하게 합니다. 결국 삶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살았던 방식입니다.
2. 불국사 – 유한한 존재가 걷는 길
불국사로 오르는 계단은 경건함 그 자체입니다. 돌마다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고, 붉은 단청 아래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오래된 숨결처럼 느껴집니다. 폴 칼라니티는 수술실과 병원 복도에서 삶의 의미를 좇았습니다. 불국사의 공간 역시 어떤면에선 그런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생과 사를 분리하지 않고, 그 사이의 경계에서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돌아옵니다. 불국사는 그 질문에 답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길을 조용히 걷게 해 줍니다.
불국사의 석등과 석탑을 지나며 나는 오래된 시간과 마주했습니다. 절은 그 자체로 시간의 아카이브입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기도했고, 누군가는 단지 걸었으며, 누군가는 이유 없이 멈춰 서 있었습니다. 폴 칼라니티는 말했습니다. “삶은 길이가 아니라, 밀도다.” 불국사는 그 밀도를 깨닫게 해줍니다. 짧은 여행이더라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의 감정은 충분히 깊습니다. 유한하다는 인식은 오히려 매 순간을 진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는 것은 늘 똑같은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유일한 장면이 있습니다. 이 불국사의 공기처럼.
3. 동궁과 월지 – 사라진 것들과의 재회
해질 무렵 동궁과 월지를 찾았습니다. 연못 위로 번지는 노을빛은 물 위에 반사되어 환상처럼 번졌습니다. 과거의 궁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물과 바람, 빛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사랑했던 것, 잃어버린 것,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경주의 연못 위 풍경은 단지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라진 것들과의 재회를 만들어줍니다. 사람은 끝을 알아야 시작의 가치를 이해합니다. 동궁과 월지의 고요함은 그 가치를 보여줍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에, 더 많이 남아 있는 풍경.
동궁과 월지는 낮보다 해질녘이 더 아름답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월광과 빛의 그림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실루엣까지, 모든 게 한 편의 영화 장면 같습니다. 사라진 것들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시간. 폴 칼라니티는 살아갈 날이 짧다는 걸 알게 된 후, ‘지금’이라는 시간에 몰입했습니다. 누구나 지나온 시간 속에 놓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동궁과 월지의 고요함은 그 재생의 공간이 되어 줍니다. 그 순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4. 황리단길 – 일상의 경계에서 발견한 삶
황리단길은 경주에서 가장 현대적인 거리입니다. 오래된 한옥 사이로 개성 있는 가게들이 들어서 있고, 커피 향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넘칩니다. 삶은 늘 무겁지만은 않습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우리가 무거운 질문을 던질수록, 오히려 가장 가벼운 순간이 그 해답이 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황리단길의 골목에서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온기를 느꼈습니다. 바람은 부드럽게 불고, 웃음소리는 먼 데까지 퍼졌습니다. 죽음의 끝을 응시했기 때문에, 더 선명해진 삶의 풍경이 이 거리에서 반짝였습니다.
황리단길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봤습니다. 친구와 웃으며 걷는 청춘, 아버지 손을 꼭 잡은 아이, 여행 중 사진을 고르는 연인들. 삶은 결국 이런 장면들의 모음일 것입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그런 장면들을 더 사랑하게 만들어 줍니다. 죽음을 생각했기 때문에 삶은 더욱 가까워지는 듯합니다. 황리단길은 어쩌면 경주의 현재일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유적 사이에서 여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루가 흐르는 곳입니다. 나 역시 그 하루의 일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폴 칼라니티가 바라던 삶의 방식대로.
결론 – 바람이 스치는 경주의 시간
경주를 떠나는 날, 나는 『숨결이 바람 될 때』의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책은 끝났지만, 그 사유는 계속되었습니다. 경주는 그렇게 한 권의 책처럼 나를 천천히 읽히게 만들었습니다. 대릉원의 고요, 불국사의 그림자, 동궁과 월지의 빛, 황리단길의 따뜻함.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삶과 죽음, 그리고 존재에 대한 문장을 하나씩 건넸습니다. 바람이 스치는 시간 속에서,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어쩌면 여행은 의미를 찾는 게 아니라, 문장이 나에게 스며들게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주에서의 시간은 정적이지만,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가 전하는 문장들은 경주의 공기 속에서도 선명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내가 지나친 능선과 계단, 정원과 거리들은 모두 각자의 언어로 삶과 죽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경주는 그 대화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연스럽게 품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걷는 시간 동안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도시에 머무는 하루는, 그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게 합니다. 경주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묻고, 멈추고, 바라보고, 다짐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내 삶의 어떤 문장도, 경주의 어느 길목처럼 고요하면서도 깊게 다가온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장은, 이 도시에 남아 내 안에서 계속 읽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