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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 – 조용한 길을 함께 걷다

by s-dreamer 2025.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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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의 아침 공기는 고요하고 차분합니다. 바쁜 도심의 소음 대신 오래된 시간의 숨결과 가만한 새소리만이 귓가에 맴돕니다. 김해의 이 조용한 아침 풍경은 마치 한 편의 서정시처럼 천천히 펼쳐집니다. 이른 시간의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의 모습도 많지 않아 한층 한산합니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이 어슴푸레 윤곽을 드러내고, 해반천 위로는 옅은 물안개가 피어오릅니다. 모든 것이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정지된 듯 잔잔한 이 도시의 분위기 속에서, 나는 김금희의 소설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지만 끝내 말하지 못한 감정들을 다룬 그 이야기. 책장을 덮었을 때 느꼈던 묵직한 여운이 김해의 정적인 풍경과 겹쳐 보이는 듯했습니다. 책과 여행을 접목한 이 연재의 마흔 번째 여정으로 내가 김해를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겉보기에 평온한 이 도시 곳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속삭임과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김해에 발을 디딘 것은 처음이지만 왠지 오래전부터 알던 곳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소설 속 정서와 이 도시의 분위기가 어딘가 닮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막하면서도 어딘가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거리 위를 천천히 걸어보면 내 마음도 덩달아 조용히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책 속 이야기와 현실의 공간이 맞닿는 순간들을 찾아 나서 보려 합니다. 조용히 숨을 고르고 길을 나섰습니다.

1. 해반천 – 흐르는 물에 실은 말

해반천을 따라 천천히 걸어 봅니다. 맑게 정화된 물줄기가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잔잔히 흐릅니다. 예전엔 오염되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작은 하천에는 물풀 사이로 물새들이 조용히 놀고 있었습니다. 발밑 모래를 스치는 물결 소리는 낮게 속삭이는 위로처럼 들렸고 둑 위 산책로에는 내 발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가끔 멀리서 자전거 벨 울리는 소리가 들릴 뿐, 인적 드문 아침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정지되어 있었습니다. 물이 거울처럼 잔잔한 날이면, 흐르는 수면에 내 모습도 희미하게 비칩니다. 그 그림자 너머 닿을 듯 말 듯 한 기억들이 흘러가는 것만 같아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난간에 기대 유유히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김금희의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 속 주인공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지만 결국 말하지 못했으리라. 겉으론 평온해 보이는 해반천의 물결 아래 보이지 않는 강한 흐름이 있듯, 소설 속 인물의 내면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감정의 격랑이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말을 잇지 못해 멈춘 순간들, 그 조용한 침묵이 지금 내 앞의 물소리에 포개어지는 것 같습니다. 해반천의 물은 아무 말 없이 앞을 향해 흐르지만, 그 고요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우리는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마치 소설을 읽으며 말 없는 행간에서 인물의 마음을 헤아리듯, 나는 해반천의 잔잔한 흐름에 깃든 말들을 가만히 들어보았습니다.

2. 수로왕릉 – 시간에 묻힌 속삭임

가락로 골목 끝, 수로왕릉에 이르렀습니다. 푸른 잔디로 덮인 둥근 고분 주위로 나무들이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약 이천 년 전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잠든 곳, 역사의 한 장면이 고요히 숨 쉬는 공간입니다. 이곳까지 오는 발걸음은 뜸하고 주변엔 적막감이 감돕니다. 나는 왕릉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아보았습니다. 김금희의 소설 속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생각났습니다. 전해지지 못한 고백이나 이루지 못한 약속이 있다면, 아마 이렇듯 땅속에 묻힌 채 조용히 남아 있을까. 전설에 따르면 먼 바다를 건너 이 땅에 온 허왕후가 수로왕의 배필이 되었다 합니다. 그녀는 타향에서 와 새로운 나라의 왕비로 살며 어떤 말 못 할 그리움을 가슴에 품었을지 문득 떠올려봅니다. 고향을 향한 아득한 그리움과 이국 땅에서의 외로움이 있었다면, 지금 이 고분 아래에서 영원한 속삭임으로 남아 있을 것만 같습니다. 수로왕릉을 스치는 바람은 차분하지만, 그 결 속에는 수천 년 전 알 수 없는 감정들의 잔향이 맴도는 듯합니다.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누군가에게 끝내 전하지 못한 말을 품고 이 왕릉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듭니다. 입술을 떼어 조용히 혼잣말로 읊조려 보지만, 그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져 금세 사라져 버립니다. 저만치서 새 한 마리가 낮게 울다가 곧 적막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남은 것은 묵묵히 고분을 지키는 몇 기의 석물(石物)과 해마다 피고 지는 풀꽃들이 전하는 조용한 위로뿐입니다. 결국 내 속삭임도 전해지지 않은 채 왕릉의 고요 속으로 스며들고, 그 자리에 쓸쓸한 잔향만이 오래 남았습니다.

3. 봉황대 유적 – 남겨진 자리의 기억

해질녘의 봉황대 유적지는 노을빛에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 김해 봉황동 언덕 위, 과거 가야의 생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이곳은 시간의 켜를 간직한 채 우리를 맞이합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이는 낙엽 소리 사이로 오래전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조개껍데기가 층을 이룬 패총과 커다란 무덤 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때는 삶의 온기가 가득했을 이 땅도 이제는 조용한 유적이 되어 말없이 그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부서진 토기 조각을 떠올렸습니다. 한때 누군가의 손에 쥐어져 일상을 함께했을 그릇이었지만, 지금은 흩어진 파편일 뿐인. 김금희의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 속 주인공의 마음도 그러했으리라. 전하고 싶었던 마음, 끝내 전하지 못한 말들이 세월 속에 파편처럼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봉황대 유적의 잔해들처럼, 그도 자신의 이야기를 완전히 다 전하지 못한 채 몇 조각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지 않았을까. 노을 속에 윤곽을 드러내는 옛 집터와 우물 자리는 마치 주인 잃은 감정들이 마지막까지 머물다 간 자리 같았습니다. 나는 고요히 앉아 저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 파편들을 하나씩 주워 모았습니다. 비록 완전한 문장이 되지는 않더라도, 주워 담은 기억의 일부를 통해 그때 하지 못한 말을 조용히 짐작해 봅니다. 유적의 적막 속에서, 말없이 전해오는 옛 시절의 기억들과 소설 속 인물의 침묵이 포개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4. 국립김해박물관 – 말 없는 유물의 이야기

여행의 끝자락에 국립김해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유리 진열장 속에서 가야 시대의 금관과 토기, 그리고 무수한 철기들이 은은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모두 한때 누군가의 삶의 일부였지만 지금은 말없이 전시된 채로 우리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전시실을 거닐며 각 유물에 붙은 설명문을 읽어보았습니다. 화려한 금관은 왕이나 귀족의 것이었을 테지만, 그 영광과 슬픔은 몇 줄의 글로 다 담기지 않습니다. 소박한 토기 표면에 남은 손자국과 무뎌진 검날의 흔적이 오히려 그들의 주인이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합니다.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을 읽으며 느꼈던 먹먹함이 다시 가슴에 번지는 것 같았습니다. 소설 속 인물의 삶에도 이렇게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눈빛이나 손짓, 혹은 긴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졌던 마음의 조각들. 박물관의 유물들은 비록 말을 할 수 없지만 그 모양새와 표면에 지난 시간의 온기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상상의 힘으로 비워진 부분을 채워 넣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비로소 완성시킵니다. 결국 유물이든 사람이든, 말로 다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침묵 역시 그 나름의 언어로 마음에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나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전하지 못한 진심은 이렇게라도 형태를 바꾸어 남는구나. 그런 생각을 품으며 유리 너머 유물들에게 조용히 작별을 고했습니다.

결론 – 침묵의 여운으로 남는 하루

박물관을 나오니 어느새 주황빛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다시 해반천 옆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해 질 녘의 김해는 더욱 적막해져 거리의 가로등 불빛마저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오늘 김해의 곳곳을 거닐며 마주한 풍경들은 김금희의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이 내게 남긴 여운과 참 닮아 있었습니다. 말로 다 하지 못해도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방식으로 마음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도시가 조용히 가르쳐 준 셈입니다. 나 역시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나 둘 떠올렸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속내가 있었지만, 김해의 정적인 하루를 지나며 그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 듯했습니다. 해반천의 물결, 왕릉의 바람, 유적의 노을, 박물관의 정적 속에서 나는 말 없는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그 침묵 속에 오히려 더 진한 감동이 스며들었습니다. 소설을 덮었을 때 가슴 한편에 남았던 설명할 수 없는 슬픔처럼, 김해에서의 하루도 잔잔한 그리움으로 저물어 갔습니다. 어느새 하늘에는 첫 별 하나가 외롭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해 보았습니다. 비록 우리 삶의 많은 순간들이 끝내 이야기할 수 없는 채로 흘러가더라도, 그 마음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남아 있으리란 것을. 김해의 고요한 밤공기처럼, 말하지 못한 마음은 쓸쓸하지만 따뜻한 여운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