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마의 도시, 통영에 닿다
통영은 오래전부터 ‘예술의 도시’로 불려 왔습니다. 바다를 품고 있고, 섬을 끼고 있고, 무엇보다도 시인과 화가, 음악가들이 사랑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청마 유치환은 통영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이 도시의 감성을 그대로 담은 인물입니다. 청마문학관을 찾은 그날, 저는 시집 한 권을 가방에 넣고 길을 나섰습니다. 『청마 유치환 시집』. 그 안에는 사랑, 외로움, 삶과 죽음에 대한 고요한 시선이 담겨 있었습니다.
문학관은 통영 바닷가 언덕 위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소박하지만 단단한 건물, 벽면에 걸린 청마의 시 구절들이 바람처럼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행복하느니라.”
너무도 익숙한 그 문장을 직접 마주한 순간, 시가 공간을 넘어 삶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와 항구는, 마치 시 속 배경처럼 정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2. 시 속의 바다를 걷다
청마문학관을 나와 통영항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인의 생가가 남아 있는 골목을 지나, 작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눈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청마의 시에는 늘 바람이 있고, 파도가 있고, 고요한 슬픔이 있습니다. 통영의 바다는 그런 시의 배경이자, 그의 시어에 생명을 불어넣는 풍경이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사랑을 한다 / 바다가 육지를 그리워하듯이.”
시인의 이 문장을 생각하며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겨울 끝자락, 통영의 바다는 잔잔했고, 마치 누군가의 편지를 가만히 받아주는 듯했습니다. 청마의 시가 품은 그리움이 바람을 타고 제 마음까지 전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혼자 걷는 이 길이, 청마가 걸었던 길과 겹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길의 끝에서, 저는 어느새 시인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바다 내음과 함께 불어오는 바람은 시를 따라 흘러가는 듯했습니다. 잔잔한 물결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고, 거리 곳곳에 놓인 시비와 표지판은 마치 작은 시집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통영의 바다를 따라 걷는 이 길은 더 이상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그것은 시인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순례이자, 내면을 정리하는 성찰의 길이었습니다.
3. 시인의 삶과 나의 사색
청마 유치환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과 이별, 가난과 열정,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외로움이 그의 인생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문학관 안 유품들을 보며 저는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단지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했고, 그 감정을 숨기지 않았던 한 사람으로서의 청마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의 시가 오늘날까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인생의 진실과 진심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 완벽하거나 미화된 문장이 아닌, 생채기 있는 고백 같은 문장들. 그것이 청마 시의 매력이었습니다. 문학관의 작은 방 안에 홀로 앉아 시집을 펼치며, 저 역시 제 인생의 조용한 문장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바다와 바람, 그리고 시. 이 세 가지는 통영이라는 도시에서 하나의 문학이 되어 있었습니다. 청마가 느꼈던 고독과 사랑의 간극은 우리가 지금도 느끼는 감정들과 닮아 있었습니다. 그러니 시가 시대를 넘어 공감받는 것이겠지요.
시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문장은 여전히 살아 있어 통영의 거리와 골목,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4. 여행의 끝, 시 한 줄을 품고
돌아오는 길, 문학관 입구에 놓인 시화 한 장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계절은 아직 봄이 아니었지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저는 봄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문학은 이렇게 계절을 앞당기고, 감정을 덧입히며, 기억을 선명하게 만듭니다. 통영에서 보낸 하루는 짧았지만, 시를 중심으로 채워졌기에 더욱 깊었습니다.
청마 유치환은 언젠가 말했습니다.
“시는 삶을 건너가는 배다.”
이 말이 떠오르며 저는 오늘 제 하루가 조금 더 가볍고 단단해졌다는 걸 느꼈습니다. 바다와 시, 그리고 고요함이 어우러진 이 도시에서, 저는 시인의 흔적을 따라 나의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통영을 떠나며, 제 마음엔 하나의 시가 머물렀습니다. 그 시는 누군가의 시가 아니라, 오늘 내가 걸으며 쓴, 나만의 시였습니다.
문학을 따라 떠나는 여행은 늘 마음 한구석을 비우고, 또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통영에서의 이 하루는 사색의 시간을 선물했고, 고요한 시의 울림을 제 마음속에 길게 남겼습니다.
언젠가 삶이 고단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저는 이 도시의 바람과 시 한 줄을 떠올리며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