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이라는 도시를 떠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생각합니다. 정동진의 일출, 안목항의 커피거리, 초당순두부처럼 관광지로서의 강릉은 분명 화려한 얼굴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바다가 아닌 도시의 안쪽, 명주동이라는 조용한 골목이었습니다. 『삼청이발관엔 어제와 오늘이 같이 앉아있다』라는 책을 읽고 난 후, 책 속 문장처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풍경’을 실제로 만나고 싶어 졌습니다. 명주동은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공간처럼 느껴졌고, 저는 그 속에서 오래된 감정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낡았지만 따뜻했습니다. 그 따뜻한 바다를 등지고, 기억이 머무는 골목으로 향했습니다. 이 선택은 여유로운 산책과 오래된 기억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1. 오래된 벽과 창, 낯설지만 따뜻한 인사
명주동의 첫인상은 조용하고 낯섭니다. 대형 프랜차이즈도 없고, 사람들로 북적이지도 않죠. 대신 그 자리를 오래된 벽돌 건물과 붉은 지붕, 철제 셔터가 대신합니다. 겉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하지만, 그 안에는 시간이 천천히 퇴적되어 있습니다. 『삼청이발관엔 어제와 오늘이 같이 앉아있다』 속 묘사처럼, 낡은 것은 새로운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골목의 돌담 위에 핀 잡초, 한때 상점이었을 간판, 벽에 부착된 오래된 공고문. 사진기를 눌러대는 대신 풍경을 눈에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이곳에서는 평범한 벤치조차도 기억의 조각처럼 다가왔고, 마치 누군가의 과거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골목은 말이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멈추는 곳마다 마음의 결이 느껴졌고, 그 결마다 따스한 감정이 덧입혀지는 골목입니다.
2. 유리창 너머로 본 시간의 의자
낡은 이발소 앞에 멈춰 섰습니다. 먼지가 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붉은 가죽 의자, 손때 묻은 거울, 그 곁에 놓인 철제 가위. 이제는 더 이상 운영되지 않는 듯한 그 공간이 묘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작가가 책에서 말했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공간은 그 자체로 기억을 보관한다.” 나는 유리창 앞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공간은 과거의 시간이 현재로 흘러드는 통로 같았고, 누구든 이 자리에 서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장소 같았습니다. 이발소 의자에 앉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대화, 웃음소리, 조용한 음악까지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의자가 비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감정의 공간을 열어주는 듯했고, 나는 그 시간의 문턱에서 묵묵히 인사를 건네보았습니다.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이 공간은 마치 어제를 오늘처럼 느끼게 했고, 그 안에서 나는 말없이 오래된 감정들과 재회했습니다.
3. 담장 너머로 들려온 풍경의 소리
명주동은 시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요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 동네입니다. 자전거 바퀴가 돌길 위를 지나는 소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트로트, 바람에 흔들리는 창틀의 진동. 그 모든 소리가 귀에 울려왔습니다. 걷다가 담장 옆에 서면, 담 너머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어느 집 마당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 부엌에서 그릇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 창문을 여는 소리. 골목은 풍경보다 소리로 기억에 남았고, 그 소리들이 나의 감정을 끄집어 올렸습니다. 책 속 문장처럼, 기억은 장소에 머무르고, 소리는 그 기억을 꺼내주는 열쇠였습니다. 나는 그 풍경 속에 오래 머물며, 내 안의 조용한 목소리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여기가 바로 오래된 나와 마주하는 자리라는 걸. 사소한 소리조차도 진심 어린 위로가 되어 다가왔고, 더없이 차분한 기분으로 골목을 걸었습니다.
4. 찻집 안에서 조용히 내 마음을 마주하다
걷다 보니 골목 안쪽에 작은 찻집이 보였습니다. 나무 간판, 유리문, 창가 자리에 놓인 오래된 소파. 따뜻한 유자차를 시키고 자리에 앉자, 창밖으로 보이는 골목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습니다. 『삼청이발관엔 어제와 오늘이 같이 앉아있다』 속 문장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낡은 의자에 앉아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언제나 새롭다.” 이 찻집은 낡았지만 따뜻했고, 조용했지만 풍요로웠습니다. 서가에 꽂힌 책들, 테이블 위의 작은 꽃병, 엽서에 적힌 누군가의 짧은 편지까지. 모든 것이 감정을 환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나는 차를 마시며 이 골목을 걸어보게 된 이유를 곱씹었고, 이 공간이 나의 일상을 돌아보게 해주는 또 하나의 거울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 모금, 한 호흡 속에서 감정이 정리되었고, 나는 무거웠던 마음 한 귀퉁이를 비울 수 있었습니다.
결론
이번 여행은 명소를 찾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명주동은 ‘어디를 갔다’보다 ‘무엇을 느꼈다’고 말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삼청이발관엔 어제와 오늘이 같이 앉아있다』를 통해 상상했던 감정의 풍경이 현실이 되었고,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조용히 스스로와 마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바다를 보지 않아도, 사진을 남기지 않아도, 이 골목은 오래도록 남을 기억이 되었습니다. 여행은 반드시 화려할 필요가 없고, 어떤 장소는 감정을 꺼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강릉의 명주동은 한켠에 묻어둔 감정을 꺼내보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그날의 조용한 걸음, 찻잔 속 여운, 창밖 풍경 하나하나가 긴 문장처럼 남았습니다. 나는 이제 그 골목을 떠났지만, 내 마음 한편엔 여전히 그 문장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