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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그곳에 가다 - 『종로의 기원』을 품은 서촌

by s-dreamer 2025. 4. 17.

종로 관련 이미지

1. 책 속 단어 하나에 이끌려, 서촌으로

“종로는 길이 아니라 기원이다.” 박상우 작가의 『종로의 기원』을 덮고 난 뒤, 가장 오래 마음에 머문 문장입니다. 도시는 늘 새롭게 바뀌지만, 어떤 장소는 그 이름 하나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서촌은 그중 하나입니다. 광화문과 경복궁이라는 거대한 이름 옆에 작고 조용히 놓인 동네. 아기자기한 골목길도 가득하지만 이곳이야말로 조선의 숨결, 식민지 시대의 그림자, 해방 이후 삶의 반복이 겹겹이 쌓여 있는 곳입니다.

『종로의 기원』은 그 이름을 통해 도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서쪽 동네’라는 단순한 지명이지만, 그 속엔 서울의 과거와 현재가 마주 서 있습니다.

책 속에서는 종로의 기원을 쫓는 여정이지만, 저는 그 경계를 따라 걷는 방식으로 서촌을 바라보았습니다. 문장의 시선으로 다시 본 익숙한 골목에서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2. 통인시장과 옥인동, 생의 소리들이 켜켜이

통인시장은 여전히 북적였습니다. 기름에 지글지글 튀겨지는 전 소리, 시장 좌판 사이를 스치는 사람들의 움직임, 그리고 두런두런 오가는 대화들.

이곳은 책 속 ‘기원’이라는 단어와는 조금 멀어 보이지만, 사실 이 골목에도 수십 년의 시간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종로라는 이름보다 더 가까운 ‘생활의 기원’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옥인동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서촌의 옛 한옥들과 오래된 담장이 이어집니다.

“이름이란 그곳을 지키는 마지막 증언이다.” – 박상우

사라진 간판들, 헐린 담장, 재건축 현장의 천막들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들은 이 골목을 걷는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었다”라고.

3. 효자동에서 찾은 시간의 문장

효자동은 책 속에서 ‘아름다운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효(孝)’라는 한자가 주는 정서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촌의 골목을 걷다 보면 그 이름처럼 조용하고 단정한 풍경을 자주 만납니다. 담장에 기대어 핀 장미 덩굴, 작은 이발소, 오래된 편지함. 그 모든 것들이 이 동네의 문장처럼 느껴지는 풍경이었습니다.

효자동 입구에 자리한 옛 신문사 건물은 이제 갤러리로 바뀌었고, 그 옆 카페에는 종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팸플릿이 놓여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기록이 또 다른 누군가의 여정이 되는 방식. 그것이 도시를 걷는 즐거움이라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효자동을 이렇게 천천히, 곱씹듯 걷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시의 속도를 늦춰주는 책, 그것이 『종로의 기원』이 전해주는 힘이었습니다.

4. 이름 아래 기억을 걷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서촌의 어느 골목에 멈춰 섰습니다. 문득, 도시라는 것이 이름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름은 어쩌면 장소를 기억하게 만드는 장치이자, 동시에 그 장소를 잊지 않기 위한 저항인지도 모릅니다.

『종로의 기원』을 통해 내가 새로이 걷게 된 이 골목은, 분명히 익숙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생경했습니다.

“기원이란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계속해서 돌아가야 할 장소다.”

이름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고, 이야기는 기억을 불러옵니다. 서촌의 길 위에서 그 이름들을 하나씩 되뇌며 걸었습니다. 통인시장, 옥인동, 효자동.

그리고 그 사이사이 이름 없이 존재하는 작은 공간들까지도. 서울의 중심에서, 이제야 이 도시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았습니다.

『종로의 기원』이 아니었다면 이 골목을 새롭게 걷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냥 스쳐 지나쳤겠지요.

하지만 지금, 이 도시의 이름들을 껴안으며 천천히,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