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인의 언덕에 오르다
윤동주문학관으로 향하는 길은 연희숲 속길이라는 이름처럼 고요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산책로를 만난다는 건 의외의 기쁨이었고, 무수히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걷는 발걸음은 문학관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순례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가을볕이 살짝 비치는 언덕은 잔잔한 노란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잎사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시인의 어릴 적 기억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윤동주의 시가 아니라면, 이 길은 그저 평범한 언덕일 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남긴 언어 덕분에 이 길은 말없는 시처럼 느껴졌고, 걷는 동안 나 자신도 시의 한 행처럼 존재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조그마한 일에만 마음을 두는가.”
윤동주의 시처럼, 제 마음도 어느날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낙엽 한 장, 햇살 한 줄기, 바람 한 점마저도 말입니다.
2. 시인의 방 앞에서 마주한 고요
문학관 입구에 다다르자, 회색 콘크리트 외벽에 새겨진 시 한 구절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서시』의 이 문장은 너무 익숙하지만, 그날따라 더 아프고 더 진하게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참 묵직하게 읊조리게 되는 문장이죠. 문학관 내부는 소박하고 절제된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시인의 방을 재현해 놓은 작은 공간, 그 안에 놓인 단정한 나무책상과 오래된 의자, 창가 너머로 들어오는 빛 한 줄기가 조용히 공간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잠시 자리를 비운 듯한 정적 속에서, 저는 윤동주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인은 부재하지만 시는 살아 있고, 그 시는 공간을 숨 쉬게 하고 있었습니다.
윤동주의 생애를 담은 전시물에는 그의 어린 시절, 연희전문 시절의 모습, 그리고 끝내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이야기까지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시는 지금까지 이 자리에 살아 있습니다.
3. 한 편의 시처럼 걷는 골목
문학관을 나서며 뒤돌아본 그 자리에는 윤동주의 기척이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연희동 골목은 전형적인 서울의 오래된 동네 같았지만, 이날만큼은 아주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골목 사이를 거닐다가 시집을 꺼내어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기를…”
그 구절을 읊조리며 발걸음을 옮기니, 담장에 드리운 담쟁이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마저 시처럼 다가왔습니다. 햇빛이 골목길의 오래된 담벼락을 비추고, 고양이 한 마리가 유유히 길을 건너는 장면은 그대로 시집의 한 장면이 되었고, 그 장면은 제 마음속에 그대로 저장되었습니다.
한 편의 시를 따라가는 여행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짧은 길이지만 마음속에는 수많은 감상이 쌓였습니다. 시는 활자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시를 쓴 사람이 걸었을지도 모를 골목을 함께 걷는 순간, 우리는 시를 ‘살아 있는 이야기’로 다시 만납니다.
4. 시의 여운이 머무는 카페에서
연희동 골목 어귀에 자리한 작은 북카페에 들어섰습니다. 낮은 조도의 조명과 책장 가득 꽂힌 시집들 사이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누군가가 메모해놓은 시 구절이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고, 그 구절은 『자화상』에서 따온 듯했습니다.
“잔잔한 슬픔을 간직한 채 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펼쳤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연희동 풍경이 한 장면씩 떠올랐습니다. 바람이 창밖 나무를 흔들고, 햇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그 공간은 더없이 시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카페는 잠시 멈춰 선 시간 속에서 시의 여운을 품고 있는 조용한 안식처처럼 느껴졌습니다.
누군가에게 그 공간은 단순한 카페일 수 있지만, 제게는 그날 하루의 감정을 정리하는 시의 마지막 행 같았습니다. 낯선 풍경과 시어들이 이곳에서 조용히 마무리되고 있었으니까요. 참 조용하고 차분한 마침표 같았습니다.
5. 시로 기억되는 하루
해가 기울 무렵, 다시 문학관 앞을 지나쳤습니다. 석양이 벽에 새겨진 시를 붉게 물들였고, 그 빛은 마치 시인의 온기처럼 따스하게 퍼졌습니다. 가방 안의 시집은 무게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가벼웠지만, 마음속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여행은 때때로 그저 한 권의 책을 꺼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책이 안내한 길 위에서 우리는 시를 만나고, 시인을 느끼고, 결국은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연희동에서의 하루는 그런 여정이었습니다. 시를 따라 걷고, 시를 읽으며 멈추고, 시와 함께 되돌아오는 하루. 윤동주라는 시인을 통해, 저는 문학이라는 조용한 등불을 마음에 켜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오늘은 더욱 쓸쓸하다.”
문학관을 떠나며 떠오른 구절입니다. 쓸쓸함은 때로 마음을 정리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런 정리는, 시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깊은 위로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