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속 문장과 현실의 풍경이 겹쳐지는 순간
『여행의 이유』를 처음 읽은 건,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밤이었습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와 선풍기 바람 사이에서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결국 나를 다시 만나는 것”
이라는 문장이 조용히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김영하 작가는 이 책에서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낯선 곳에서 오히려 자신과 가까워졌다고 말합니다. 자신과 가까워지는 기분은 뭘까...? 그중에서도 ‘부산’이라는 이름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낯설지만 익숙하고,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은 그 도시.
책을 덮고 나서 며칠 후, 정말로 부산행 기차에 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책 속에서 그가 걸었던 거리, 그가 바라본 바다를 나도 보면 뭔가 느낌이 다를 것 같았습니다. 광안리 바닷가는 여전히 푸르렀고, 해변 끝에 앉아 『여행의 이유』를 펼치니, 바닷바람에 페이지가 넘겨지는 그 감각마저 하나의 문장이 되는 듯했습니다. 마치 김영하의 문장이 저를 이곳으로 끌어당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2. 광복동과 자갈치시장, 도시가 품은 이야기의 결
부산이라는 도시는 이 책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서사적 인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김영하는 자갈치시장 인근을 걸으며 스스로와 대화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려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중요하다”
는 그의 고백은, 그 거리에서 걷는 제 발걸음과 겹쳐졌습니다. 바다 냄새, 사람들의 활기찬 목소리, 시장의 생생한 풍경 속에서, 저는 마치 한 편의 산문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광복동 골목길에는 1950년대 피란민의 흔적과 현대적인 감성이 함께 공존합니다. 빈티지한 간판과 골목 카페, 그 사이사이에 숨은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곳을 걸으며 『여행의 이유』속 부산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고, 책에서 느꼈던 묵직한 감정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사람은 왜 여행을 떠나는가? 새로운 풍경을 보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내 안의 오래된 감정을 꺼내기 위해서일까요.
자갈치시장에서 생선을 굽는 냄새와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반대편 골목에선 낯선 이국의 언어들이 들려옵니다. 부산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시였습니다. 『여행의 이유』를 읽고 걷는 이 길은, 마치 김영하 작가의 여행을 제가 다시 이어 쓰는 듯한 기분을 주었습니다.
3.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는 법
서면에서 해운대까지, 하루 종일 부산을 걸었습니다. 중간에 들른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오래된 문고판 『여행의 이유』를 다시 만났습니다. 책 속 문장을 필사하듯 베껴 두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김영하 작가는 책에서 말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 그게 바로 여행의 본질이다.”
낯선 도시에서 혼자 앉아 있는 이 순간, 저는 그 말을 깊이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감천문화마을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골목마다 걸려 있는 색색의 우산들과 벽화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여느 관광지처럼 붐비는 곳이지만, 그 속에서도 제 시선은 조용히 한 구절을 따라갑니다.
“여행은 낯선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연습이다.”
마치 이곳에 오기 위해 수많은 감정을 지나왔던 것처럼, 제가 이 골목에 다다르기까지의 여정 역시 하나의 연습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4. 책으로 시작된 여행, 여행이 다시 책이 되다
여행의 마지막 날, 저는 영도다리 근처 찻집에서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항구와, 그 너머에 떠오르는 도시의 불빛들. 『여행의 이유』를 다시 펼쳐보며 문장들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우리는 떠나온 도시보다 도착한 도시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이 문장이 유독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부산은 저에게 낯익은 듯 새롭고, 잊고 있던 질문들을 다시 꺼내게 만든 도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른 송도 해상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책 속 어느 문장보다 선명하게 마음을 채웠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책도, 지도도 필요 없었습니다. 눈앞의 풍경과 그에 반응하는 제 감정이 전부였으니까요. 『여행의 이유』가 아니었다면 이 감정들을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김영하 작가가 자신을 찾아 떠났듯, 저 역시 이 여정을 통해 조금은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부산역으로 돌아오는 길, 저는 마지막으로 『여행의 이유』의 첫 장을 다시 펼쳤습니다. 모든 여행은 돌아옴으로써 완성된다는 문장처럼, 이 여정도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부산의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았고, 처음 이 책을 읽으며 막연히 떠나고 싶었던 감정이 이제는 또렷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단단해졌고 조금 더 나다워진 것 같습니다.
『여행의 이유』가 제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방향이 아닌,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싶은가? 그 질문은 부산이라는 도시 위를 걷는 내내 마음속을 맴돌았고, 아마도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단순한 여행서가 아니라 삶의 지도를 그리게 하는 문학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