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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그곳에 가다 –『너를 생각해』와 함께한 조용한 서점 여행

by s-dreamer 2025. 4. 13.

제주 관련 이미지

 

1. 바람이 머무는 골목, 책이 숨 쉬는 공간

 

제주 애월의 조용한 골목 어귀, 커다란 돌담을 지나자 낮은 지붕의 흰 건물이 보였습니다. 나무 간판에 적힌 이름, ‘한 페이지’.

처음엔 책방 이름이 조금 특별하다고 생각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하루를 위한 단 한 페이지의 문장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나직한 음악과 책장 가득 꽂힌 책들,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귤나무의 풍경까지. 모든 것이 책 속의 문장 같았습니다. 세상이 너무 시끄러울 때, 이곳은 그 소음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쉼표 같았습니다.

이 서점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내면을 조용히 건드리는 문장이 이곳에는 있었습니다. 책방 주인은 조용히 커피를 내리며 책을 고르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고, 책과 독자 사이의 조용한 대화를 존중해 주는 분위기였습니다. 제주는 여행지였지만, 이곳은 마치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 같았습니다. 외로움보다 익숙함이 먼저 다가오는 그런 공간.

저는 이곳에서 『너를 생각해』라는 작사집을 꺼내 들었습니다. 한 페이지 서점은 하루에 단 한 권의 책만 소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벽 한쪽에 그날의 책과 문장이 적혀 있었고, 사람들은 그 문장에 이끌려 서점 문을 열곤 한다고 합니다.

책방이라는 공간이 이토록 사람의 리듬을 느리게 만들고, 하루를 재정비하게 해주는 곳이란 사실이 조금은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제주라는 풍경과도 너무나도 어울리는 그런 곳. 

 

2. 『너를 생각해』, 잊고 있던 감정을 깨우다

 

『너를 생각해』는 김이나 작사가가 쓴 에세이이자, 노랫말과 삶의 경계를 허문 문장들로 가득한 책이었습니다. 익숙한 가사들이 문장으로 다시 다가오자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느껴졌습니다.

“사랑이란 이름의 이별을 겪은 날”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게 떨렸습니다. 제주 바람은 서늘했지만, 그 문장은 따뜻하게 제 마음을 데웠습니다. 서점의 고요함 속에서 저는 책과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책장을 넘길수록 누군가를 생각했던 기억들이 문장과 함께 떠올랐습니다. 김이나 작가는 짧은 글 안에 감정을 오래도록 담아두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 글들은 노랫말처럼 반복되어, 읽는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감상적인 글을 넘어서, ‘나도 그런 감정을 느꼈었다’는 공감의 다리를 놓아줍니다. 서점 ‘한 페이지’와 이 책은 서로 잘 어울렸습니다. 고요한 장소와 말 없는 문장, 그 안에 스며든 감정이 오늘 하루를 부드럽게 감싸주고 있었습니다.

책의 여백이 주는 힘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느꼈습니다. 말이 적은 문장은 오히려 마음속 깊은 울림을 남기고, 긴 문장보다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책을 덮고 난 후에도 한동안 그 문장들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3. 한 페이지 속에서 만난 나의 조각

 

책의 한 문장을 베껴 적은 종이를 들고, 서점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너의 기억에서 내가 잊히는 순간까지도, 나는 너를 생각해.”

그 문장을 조용히 읽다 보니, 예전의 내가 떠올랐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했지만 그 마음을 끝내 전하지 못했던 시절, 혹은 사랑을 보내고도 미련을 품었던 순간들이요. 문장은 때로 기억을 소환하는 열쇠가 되기도 하니까요.

서점이라는 공간이 주는 고요함 덕분에 저는 오랜만에 제 감정을 솔직히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제주 바람이 창을 스치고 있었고, 안에서는 잊고 있던 내 마음이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문장 하나가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있다면, 이 순간만큼은 그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습니다. ‘한 페이지’는 그렇게 하루를 바꾸는 단 하나의 문장을 품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문장을 품은 채, 조금은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 어쩌면 그 답은 거창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만 마음에 닿는 단 하나의 문장을 찾기 위해, 낯선 곳까지 기꺼이 발걸음을 옮기고 싶은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4. 여운이 머무는 여행의 끝에서

 

책방을 나와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귤밭 사이 벤치에 잠시 앉았습니다. 오늘 하루는 특별한 관광지도, 유명한 맛집도 없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행이란 결국 풍경이 아닌 감정으로 남는다는 걸, 이곳에서 배운 듯했습니다.

『너를 생각해』라는 책은 내 마음에 모아둔 말들의 앨범 같았고, ‘한 페이지’는 그 앨범을 조용히 열어볼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문장의 여운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오래 기억될 장면 하나가 생겼습니다.

“그날의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한 페이지는, 결국 나를 돌아보는 한 권의 책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언젠가 제주의 어느 조용한 골목에서, 마음에 닿는 문장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페이지’는 그저 작은 책방이지만, 누군가의 하루를 바꿔줄 수 있는 문장을 조용히 품고 기다리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