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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그곳에 가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그 거리, 교토에서 보내온 편지

by s-dreamer 2025. 4. 13.

교토 관련 이미지

1. 소설을 품은 도시, 교토에 닿다

교토역에 내리는 순간, 공기부터 달랐습니다. 오래된 도시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숨결이 공기 속에 녹아 있었습니다. 저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꺼내 들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은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익명의 편지를 통해 서로의 인생을 엮어주는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그 배경이 된 교토의 작은 거리들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나미야 잡화점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어디선가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죠. 교토의 주택가 골목을 걷는 동안, 소설 속 인물들이 오가던 풍경을 상상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돌리던 쇼타, 음악에 인생을 건 미우라, 가게 앞 우체통에 몰래 편지를 넣던 사람들.

그 모든 장면이, 제가 밟고 있는 이 골목과 겹쳐졌습니다. 실제가 아닌 상상 속 공간일지라도, 문학은 이렇게 장소를 살아 숨 쉬게 만듭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교토라는 공간에 이야기를 입히고, 저는 그 이야기를 따라 걷는 여행자가 됩니다.

관광지로서의 교토가 아닌, 일상으로서의 교토에 발을 들이게 된 건 이 책 덕분이었습니다. 관광객이 모이는 화려한 거리보다 조용한 골목, 오래된 간판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며 걷는 일은 문학을 동반한 여행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걷는 속도’와 ‘생각의 속도’가 맞아떨어지는 기분을 느꼈고, 그 순간이야말로 여행이 선사하는 진짜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편지가 오가던 가상의 가게 앞에서

교토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사가 아라시야마 근처의 한 골목에 닿았을 때, 문득 여기가 소설 속 나미야 잡화점이 있을 법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된 상점 하나, 목재 창틀이 세월을 말해주는 조용한 거리. 물론 정확한 장소는 아니지만, 이곳에 멈춰 서니 마음속에 많은 편지들이 오고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앉아 조용히 편지 한 줄을 써 보았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시작된 글은, 제가 잊고 있었던 감정들을 다시 끄집어냈습니다. 나미야 씨가 있다면 무슨 말을 해줄까 상상하며, 책 속의 장면을 현실의 감정으로 옮겨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교토의 이 고요한 풍경은 그 상상을 충분히 받아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 편지를 나 자신에게 보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답장은 없어도 좋고, 누군가 읽지 않아도 괜찮은 편지. 어쩌면 소설 속 그들도 누군가의 조언보다는,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그 ‘과정’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요.

교토라는 도시는 그 과정을 차분히 지켜봐주는 묵묵한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울지 않아도 괜찮다고, 묵묵히 옆에 있어주는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3. 교토의 밤, 소설의 여운과 함께

해가 지고, 조명이 하나둘 켜질 때쯤 저는 교토 기온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전통 가옥들이 줄지어 선 골목은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었고, 오래된 책 한 권이 시간 속에서 살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처럼 누군가의 삶에 스며드는 한 문장을, 저도 하루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가만히 머물 수 있었던 그날 밤, 저는 숙소 창밖으로 흐르는 교토의 밤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조용한 어둠 속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현실과 소설이 섞이는 경험, 그리고 그 경계에 앉아 조용히 감정을 정리해 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소설의 여운은 밤이 깊어질수록 또렷해졌습니다. '고즈넉하다'라는 말로 부족했던 그날의 교토의 밤은 그 여운을 조용히 감싸 안아주었고, 저는 내일의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조용히 마음속으로 되뇌었습니다.

여행은 물리적인 이동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감정의 깊이를 더해주는 ‘내면의 이동’이기도 하다는 걸 실감한 밤이었습니다.

4. 소설과 여행, 그리고 내 이야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질문’을 다룹니다. 누구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고민, 말 못할 속사정, 지나간 기회에 대한 아쉬움. 소설 속 인물들은 그것을 편지로 써내려 갔고, 누군가는 그 편지를 정성껏 읽고 응답했습니다.

이 책이 감동적인 이유는, 그 모든 대화가 손으로 쓰인 편지였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저는 교토역의 한 카페에서 노트를 꺼내 다시 글을 씁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저 역시 한 편의 편지를 쓴 기분입니다.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끝났지만, 그 여운은 제 안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 문학은 그렇게 여행을 특별하게 만들고, 여행은 다시 문학을 살아 있는 이야기로 바꿔놓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조용한 독자이자,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일, 그 첫 문장을 교토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