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언덕과 골목, 감정이 흐르는 도시
오노미치는 고양이의 도시이자 언덕의 도시입니다. 좁고 가파른 계단길 사이로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작은 신사와 고양이 사당이 길목마다 자리합니다. 이곳은 바쁘게 흐르는 세상과는 다른 속도를 살아갑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나는 어딘지 모를 잔잔한 이별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다나베 세이코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떠올랐습니다. 조제와 츠네오, 서로를 사랑했지만 끝내 머물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 그 감정의 온도는 이 도시의 풍경과 어쩌면 닮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노미치는 그렇게, 사랑이 남긴 잔상을 품은 도시였습니다.
1. 고양이 골목 – 조용한 존재가 주는 위로
고양이 골목은 오노미치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입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벽돌 틈새에 앉아 있는 고양이 조형물, 그리고 진짜 고양이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조제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벽을 쌓고, 고양이처럼 고독한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고독은 외면이 아니라, 조용한 자기 보호였습니다. 이 골목에서 나는 고양이들과 나란히 앉아, 조제가 느꼈던 세상과의 거리감을 헤아려봅니다. 그 거리는 누군가에겐 이기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처 위에 얹은 보호색이었습니다. 고양이의 눈빛처럼, 말없이도 많은 것을 품고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고양이 골목의 끝자락, 돌담 너머로 작은 성당이 보였습니다. 그곳엔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조제는 어쩌면 이런 골목 끝에 스스로를 숨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 세상의 속도에 맞춰 사는 일. 그것이 그녀에겐 너무 큰 무게였을 것입니다. 오노미치의 고양이들은 기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 햇살을 받습니다. 나는 그런 고양이들의 태도에서 조제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 이 골목은 그녀의 조심스러운 사랑을 담고 있었습니다.
2. 천천히 흐르는 언덕길 – 함께 걷는다는 의미
오노미치의 언덕길은 예쁘지만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경사가 가파르고, 오래된 돌계단은 발끝에 힘을 줍니다. 나는 그 길을 오르며 조제와 츠네오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조제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던 그 장면을, 츠네오가 등을 내주었던 기억을. 함께 걷는다는 건 누군가의 속도에 맞춘다는 뜻이겠죠. 언덕길을 오르며, 나는 두 사람의 걸음을 따라가 봅니다. 사랑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지만, 한 사람이 기다려줄 때 그 거리는 가까워집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속에서, 나는 조제가 마지막으로 바라보았을 세계를 상상해 봅니다.
언덕길을 오르며 나는 몇 번이고 숨을 고르며 멈춰 섰습니다. 조제와 츠네오가 함께 이 길을 걸었다면, 그는 아마 휠체어를 밀며 숨을 몰아쉬었겠지.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조제는 그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걷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수십 번 떠올렸습니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때론 감정을 나누는 방식이 됩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 사람이 바라보는 풍경을 함께 보고 싶다는 소망. 언덕길 위에서 나는 그 사랑의 형태를, 무겁지만 따뜻하게 느꼈습니다.
3. 오노미치 미술관 – 감정의 여백을 담는 공간
오노미치 미술관은 작은 규모지만, 감정을 담는 데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현대 작가들의 전시부터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까지, 그 안에는 비워진 여백과 조용한 울림이 공존합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감정의 강도를 높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깊게 스며듭니다. 미술관의 흰 벽은 마치 조제가 쓴 동화책의 페이지 같았습니다. 이야기는 작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조제는 세상을 향해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었고, 그 감정은 츠네오를 통해 세상에 닿았습니다. 미술관은 그런 감정의 흐름을 받아주는 조용한 공간이었습니다.
미술관 내부에는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얀 벽면에 걸린 풍경화 한 점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아무 설명도 없었지만, 그 그림은 조제의 방처럼 느껴졌습니다. 소설 속 조제는 동화를 썼습니다. 현실에서는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그 세계에 담았겠죠. 미술관은 그런 감정의 피난처 같았습니다. 말로 하지 못한 사랑, 전하지 못한 진심, 다 담지 못한 후회. 모두가 이 공간에 걸려 있었습니다.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고도 전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이곳에서 또 깨닫습니다. 츠네오 역시 조제의 조용한 세계를 존중했기에 끝까지 그녀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4. 세토 내해 바다 – 이별을 품은 풍경
오노미치의 마지막은 언제나 바다입니다. 세토 내해는 호수처럼 잔잔하지만, 그 잔잔함은 오히려 감정을 더욱 또렷하게 만듭니다. 조제가 츠네오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심했던 그 순간, 그녀는 어쩌면 이런 바다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별은 흔히 슬픔으로만 기억되지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다르게 말합니다. 이별은 누군가를 위해 내리는 용기일 수도 있습니다. 세토 내해를 바라보며, 나는 사랑이 남긴 여운이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 어딘가에 머무는 이유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조제는 혼자가 되었지만, 그 기억만큼은 끝까지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토 내해의 바다는 마치 한 장의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파도 소리도 낮고, 해안가의 바람도 온화합니다. 그런 풍경은 격한 감정이 아닌,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는 감정의 무게를 품고 있었습니다. 조제가 이별을 택했을 때, 그녀는 자신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츠네오를 위한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외면이 아니라 배려였습니다. 나는 그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사랑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떠나보내면서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오노미치의 바다처럼 오래도록 잔잔하게 머뭅니다
결론 – 오노미치, 조제가 머물다 간 골목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짧은 이야기지만 긴 여운을 남깁니다. 오노미치의 골목, 언덕, 고양이, 그리고 바다는 그 여운이 걸어간 길 같습니다. 조제는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타협했고, 츠네오는 조제를 통해 성장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 감정은 이 도시 곳곳에 아직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오노미치는 그런 기억을 놓치지 않고 품어주는 도시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사랑이 반드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때로는 흘러간 감정마저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풍경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깨달음이 나를 더 깊은 여행자로 만들어 주는 듯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