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는 도시보다는 풍경으로 기억되는 이름입니다. 지명이라기보다 풍경의 감정, 바다의 언어. 이번에 여수를 찾은 건 오직 그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김훈의 『여수의 사랑』이라는 책에서 느꼈던, 바람과 시간과 상처가 겹겹이 쌓인 그 도시의 결을 보고 싶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은 작고 슬펐고, 말보다 눈빛이 많았으며, 설명보다 풍경이 많았습니다. 그곳을 걸으며 그 서사의 바깥을, 아니 그 잔향을 따라가 보고 싶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도시의 이름과 결합될 때, 거기엔 어떤 풍경이 있을까. 그렇게 천천히 여수로 향했습니다.
1. 이순신 광장, 말보다 조용한 바다
여수의 중심, 이순신 광장은 사람들로 붐비지만, 그 바다 앞에 서면 말이 줄어듭니다. 광장의 끝에 서서 한참이나 그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수의 사랑』 속 주인공은 말없이 이별을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뎠죠. 그 모습이 바다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없이 파도는 밀려오고, 말없이 다시 물러갑니다. 여수의 바다는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그 고요함이 어느새 나를 잠잠하게 만듭니다. 바다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내 안의 부서졌던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 놓을 수 있었습니다. 여수의 바다는 그런 조각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삶이라고 말해주는 듯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거센 감정보다, 잠잠한 수용이 더 깊은 위로가 될 때가 있죠. 딱 그런 때였습니다.
2. 진남관, 오래된 시간 속을 걷다
진남관은 시간을 품은 목조건물입니다. 조선의 수군 본영이 있던 곳, 하지만 지금은 아주 조용한 건물입니다. 그 기둥 사이를 걷다 보면 나무에서 오래된 바람 소리가 들립니다. 김훈의 문장처럼 절제된 미학이 이 공간에도 있습니다. 과장 없이 단단한 아름다움. 『여수의 사랑』의 인물들은 대부분 말이 없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 무게가 이곳의 기둥에도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말없이 그 공간을 걸으면서, 나도 조용히 내 안의 기억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어떤 감정은 설명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의미가 된다는 것. 진남관의 침묵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부족한 사람들이 가진 무게는, 때로 가장 명확한 정직함이 됩니다.
3. 돌산대교를 건너는 저녁
여수에서 저녁은 조금 더 깊어집니다. 돌산대교 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말 그대로 풍경 그 자체입니다. 붉은 해가 천천히 가라앉고, 물결에 스치는 빛들이 도시의 윤곽을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여수의 사랑』의 후반부를 떠올리며, 나는 그 다리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남아 있는 상태, 그 애매함을 이 도시의 저녁은 잘 이해해 주는 것 같습니다. 사라지지 못한 마음,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 모든 것이 여수의 저녁과 어울렸습니다. 다리 위 바람은 차가웠지만, 마음은 조용히 정돈되었습니다. 그건 끝이 아니라, 천천히 가라앉는 감정의 모양이었습니다. 침묵의 윤곽이 그려지는 풍경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4. 향일암, 바다와 나를 마주보다
향일암은 가파른 길을 올라야 닿을 수 있는 절입니다. 아침 일찍 찾은 그곳에서 나는 여수 바다를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절벽 위에 서서 바라보는 바다는 넓고 깊고 조용했습니다. 『여수의 사랑』 속 인물들이 결국 마주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사랑이든 상실이든, 결국 그 끝에는 자신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향일암의 바다도 그랬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바다를 보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 마음을 보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말없이 울었고, 또 웃었습니다. 여수의 바다는 어떤 감정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해 줍니다. 그래서 그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꺼내기 힘든 감정도, 여수의 바다 앞에서는 꺼낼 수 있었습니다.
여수는 나에게 정지된 풍경처럼 느껴졌습니다. 도시가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죠.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 골목을 돌면 들려오는 바람 소리, 이름 모를 가게의 창밖 풍경들까지. 모두가 오래전 기억 속 한 장면처럼 다가왔습니다. 『여수의 사랑』 속 인물들처럼, 여수의 사람들도 말이 많지 않았습니다. 대신 눈빛이 있었습니다. 어떤 대화보다 깊은 온기가 담긴 눈빛. 나는 그 시선을 통해, 말보다 큰 감정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숙소 창가에 앉아 여수 밤바다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멀리 돌산대교가 빛나고, 파도 소리는 유리창을 타고 들려왔습니다. 김훈의 문장은 종종 바다의 소리처럼 느껴집니다. 날것의 언어, 그러나 차갑지 않은 문장들. 『여수의 사랑』은 인물들의 감정을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그 고요한 사랑의 무게를 끝내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나는 그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이 도시도 그랬습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그 안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여수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걷는 동안, 머릿속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정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김훈의 문장은 항상 무엇을 단정 짓지 않습니다. 여수 역시 그렇습니다. 이 도시는 해답보다 질문에 더 가까운 공간입니다. 그 질문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공간. 그래서 여수는, 그리고 이 책은, 내게 ‘사랑’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반드시 화려하지 않아도 되는, 조용한 사랑. 반드시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존재 자체로 무게 있는 마음. 그걸 여수에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수는 단지 풍경이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조용히 되돌아보게 해주는 공간이었습니다. 『여수의 사랑』이 다룬 감정들, 상실과 체념, 그리고 아주 묵묵한 마음의 움직임은 여수라는 도시의 리듬과 꼭 닮아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서는 특별한 경험을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도 좋습니다. 그저 걷고, 보고, 느끼고 그렇게 비워진 자리에서 진짜 감정이 고요히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 더할 나위 없겠죠.
사랑이라는 단어는 자주 사용되지만, 진짜 사랑은 조용한 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들뜨거나 요란하지 않습니다. 『여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의 모양을 보여주었고, 여수는 그 모양을 체감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건 마치 낡은 엽서에 쓰인 몇 줄의 문장 같기도 하고, 무심히 흘러가는 파도 속 침묵 같기도 했습니다. 말이 줄어들고 마음이 많아지는 도시, 그곳이 여수였습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 창밖을 바라보며 그곳의 빛과 그림자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순간들은 대부분 조용했다는 걸, 여수는 다시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용한 감정을 담아낸 한 권의 책이, 이 여행의 방향을 정해주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여행은 단지 여수를 다녀온 기록이 아니라, 내 마음 안 어딘가에 조용히 남을 ‘사랑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여수는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고도 사랑을 가르쳐주는 도시일지도 모릅니다. 말없이 마음을 건네는 법, 기다리는 마음을 품는 법, 멀리서 바라보는 애정을 잃지 않는 법. 그 모든 감정들이 여수라는 이름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김훈의 문장처럼 절제된 감정이 더욱 깊게 스며드는 방식으로. 여수의 하늘과 바다와 그 침묵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