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을 찾은 건 아주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무작정 떠나기보다 ‘작은 힐링’이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챙겼다. 김금희의 문장은 언제나 크게 소리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 조용하지도 않습니다. 어딘가 묻혀 있던 감정을 건드려주고, 그 안에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보령의 바다는 그런 책과 닮아 있었습니다. 거칠지 않고, 수면 아래로 오래된 파문이 번져가는 바다. 나는 이곳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들을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1. 대천해수욕장 – 사라지지 않는 여름의 그림자
대천해수욕장에 도착한 날은 유난히 하늘이 맑았습니다. 바다는 잔잔했고, 그 위로 석양이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해가 지고 나면 사람도 감정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속 이야기들도 대부분 그런 시점을 담고 있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는 말, 돌이킬 수 없지만 여전히 잊히지 않는 순간. 나는 해변을 걷다 문득 떠오른 문장을 중얼거렸습니다. “당신이 미안하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이제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그 말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대천해수욕장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해가 질 무렵, 바다는 붉은 기운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위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하나둘 늘어났습니다. 파도 소리는 리듬을 반복했고, 사람들의 발자국은 금세 지워졌습니다. 나는 그것이 관계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어떤 감정은 오래도록 남는 것 같아도, 이내 파도에 씻기듯 사라집니다. 하지만 사라졌다고 해서, 그 기억이 없던 건 아닙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속 인물들은 바로 그런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단,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 그들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독자는 그 깊이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이야말로, 오히려 더 깊은 공감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 무창포 바닷길 – 관계란 결국 마주 걷는 길
무창포의 바닷길은 썰물 때가 되어야 모습을 드러냅니다. 처음엔 그저 신기했지만, 한참을 바라보니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이 바다는 늘 그 길을 품고 있었지만, 때가 되어야만 그 길이 나타난다는 것.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인물들도 그랬습니다. 상처받고, 멀어졌지만, 결국 어떤 감정은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다만 꺼내지 못했을 뿐. 썰물이 만든 길 위를 걷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향한 길도 어쩌면 그렇게, 시간이 흘러야만 나타나는 게 아닐까. 누군가와 다시 마주 걷기 위해, 지금의 침묵도 필요한 시간일지 모릅니다.
무창포 바닷길 위를 걷다 보니 문득, 예전에 소원 하나를 종이에 적어 접어두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꺼내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어떤 마음. 어쩌면 누군가와의 관계도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오히려 더 길게 남는 법이니까요. 김금희의 소설은 그런 마음을 아주 조심스럽게 두드립니다. 다정한 듯 무심하고, 차가운 듯 따뜻한 그 어투. 나는 무창포의 길 위에서, 오래도록 멀어졌던 사람 한 명을 떠올렸습니다. 다시 만나지도, 되돌릴 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 마음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이 바닷길 위에서 실감했습니다.
3. 죽도 상화원 – 꽃은 혼자 피지 않는다
죽도는 섬이지만, 그 안에 있는 상화원은 정원 그 자체였습니다. 수국과 동백, 철쭉이 뒤섞여 꽃을 피운 자리. 나는 그 속에서 ‘관계’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는 방식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친구이자 연인, 동료이자 타인으로. 죽도의 정원도 그랬습니다. 혼자서 자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람과 햇살, 그리고 서로의 그림자 아래 피어난 식물들. 나는 그곳에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을까’라는 질문을 오랫동안 안고 있었습니다. 꽃은 혼자 피지 않습니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도 상화원의 정원은 기대보다 훨씬 크고 풍성했습니다. 나무는 울창했고, 꽃은 겹겹이 피어 있었습니다. 바람은 잔잔하게 불었고, 햇빛은 나뭇잎 사이로 쏟아졌습니다. 나는 수국이 피어 있는 그늘 아래 앉아 책을 펼쳤습니다. 김금희의 문장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음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우리는 너무 멀리 돌아왔다.” 그 문장은 정원의 풍경과 닮아 있었습니다. 관계란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만나는 것. 혹은 만나지 못하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 나는 그 정원에서 내가 흘려보냈던 감정들을 되짚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나를 어떻게 성장시켜 왔는지를 떠올렸습니다.
4. 성주산휴양림 – 희미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빛
여행의 마지막은 산으로 향했습니다. 성주산휴양림은 나무가 무성했고, 숲은 깊었습니다. 햇살은 촘촘히 새어 들어왔고, 그 빛은 희미했지만 선명했습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라는 제목처럼, 이 빛은 아주 작지만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란,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따뜻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고, 가까이 가야 느껴지는 감정. 나는 벤치에 앉아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그리고 문득 마음이 울렸습니다. “그는 사라지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그를 생각한다.” 김금희의 문장은 그렇게, 숲 속에서도 내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성주산휴양림에 도착했을 때는 이른 저녁이었습니다. 바람은 시원했고, 나무는 더욱 짙어 보였습니다. 숲 속에 들어서자 도시의 소음은 사라지고, 내 안의 소음만 남았습니다. 나는 천천히 걷다가 한 벤치에 앉았습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그런 순간을 위해 쓰인 책처럼 느껴졌습니다. 조용한 숲에서 조용한 문장을 읽는 일. 그리고 그 속에서 내 마음의 조각을 하나씩 꺼내보는 일. 이곳의 빛은 이름 그대로 희미했지만, 그렇기에 더 귀했습니다. 강렬한 감정보다, 아주 작고 미세한 감정들이 더 오래 기억된다는 사실을 나는 여기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결국 나를 나답게 만든다는 것도.
빛은 아주 작아도 우리를 향해 있다
보령에서의 여행은 크고 확실한 감정 대신, 작고 섬세한 감정들을 만나게 했습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처럼, 이 도시는 조용히 마음의 힐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파도, 바람, 나무, 그리고 꽃. 모두가 말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전해주었습니다. 나는 그 속에서 내가 잊고 지냈던 마음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습니다. 관계는 늘 복잡하고, 감정은 자주 흐릿해집니다. 하지만 그 희미한 감정들이 모여 결국 삶을 지탱합니다. 보령의 풍경처럼, 김금희의 문장처럼. 그 빛은 아주 작지만, 분명히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