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노현 고원 지대에 자리한 가루이자와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휴양지입니다. 여름에는 선선한 기후 덕분에 수도권 사람들이 피서를 오고, 겨울에는 눈 덮인 풍경을 보러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울창한 숲과 맑은 공기, 세련된 상점과 레스토랑이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단순한 휴양지를 넘어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입니다. 나는 안도 타다오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떠올리며 가루이자와를 걸어보았습니다. 안도가 말했던 "자연과 건축의 대화"를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이곳에서, 빛과 공간, 그리고 시간의 결을 천천히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이 도시는 빠른 소비가 아닌, 느린 스며듦을 통해 여행자와 소통하는 곳입니다. 바쁜 일상에 지친 감각을 하나하나 깨우는 장소, 가루이자와. 나는 그 속에서 조금씩 숨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1. 구 가루이자와 거리 – 전통과 현대의 공존
구 가루이자와 거리에는 오래된 서양식 저택과 작은 교회, 그리고 세련된 카페와 상점이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정착했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거리는,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장소입니다. 낡은 벽돌 건물과 현대적인 부티크가 나란히 서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층층이 쌓여 만든 풍경처럼 느껴집니다. 안도 타다오가 건축에서 말한 ‘기억의 계층’이 이곳에도 살아 있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오래된 간판, 낡은 나무 창틀,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품은 담장이 눈에 띕니다. 구 가루이자와 거리를 걷는 것은 마치 시간의 강을 따라 거슬러 가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나는 이 거리와 함께 흐릅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오래된 찻집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곳이 품고 있는 깊이를 조용히 음미해 보았습니다.
2. 세인트 폴 교회 – 빛이 머무는 공간
구 가루이자와 거리 깊숙이 자리한 세인트 폴 교회는 단순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공간입니다. 이 교회는 화려한 장식 없이, 오직 빛과 나무의 온기로 공간을 채웁니다. 하얀 벽과 목재 구조물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자연광은, 방문객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줍니다. 안도 타다오가 추구했던 ‘빛이 공간을 완성한다’는 개념이 이곳에서 완벽하게 구현되고 있었습니다. 햇살은 벽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나무 벤치 위에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세인트 폴 교회 안에서는 시간이 느려지고, 소리마저 투명해집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조용히 숨을 고릅니다.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빛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감각에 몸을 맡깁니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어떻게 자연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이 교회는 조용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조용함이야말로 진짜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3. 가루이자와 호수 – 자연과의 교감
가루이자와 호수는 작은 거울 같습니다. 잔잔한 수면 위로 비치는 하늘과 숲, 그리고 빛의 흔들림은 매 순간 다르게 빛납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면, 호수는 마치 또 하나의 하늘이 됩니다. 안도 타다오가 건축에서 물을 "빛의 캔버스"로 삼았던 것처럼, 가루이자와 호수는 빛과 자연을 매개로 공간을 확장시킵니다. 나는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발끝에서 잔잔하게 퍼지는 물결, 수면에 비친 나뭇가지의 그림자,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 모든 것이 조용하면서도 살아 있었습니다. 가루이자와 호수는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장소인듯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보다 더 많은 것들이 마음에 스며듭니다. 호수 위로 스치는 빛의 무늬를 바라보며, 나는 순간과 영원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기분을 느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잠시 멈추는 듯한 이 시간 속에서, 나는 진짜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4. 호시노 온천 – 휴식과 재충전의 공간
가루이자와의 호시노 온천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입니다.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이 온천은, 인공적인 것 없이 자연의 품을 그대로 살려냈습니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온천수 위로 피어오르는 부드러운 김.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온천수에 몸을 담갔습니다. 물의 따뜻함이 피부를 넘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번져가는 듯했습니다. 안도 타다오가 강조했던 ‘공간과 몸의 대화’가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온천에 몸을 맡기고 숲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곳은 단순히 피로를 푸는 장소이기보다는 몸과 마음을 동시에 위로받는 치유의 공간이었습니다. 호시노 온천은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룰 때 얼마나 깊은 휴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조용히 알려줍니다.
결론 – 가루이자와, 빛과 자연이 어우러진 도시
가루이자와는 자연과 건축, 전통과 현대, 물질과 비물질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도시입니다. 안도 타다오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처럼, 이곳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공간을 지배합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여행이 아니라, 천천히 스며드는 여행이 이곳의 방식입니다. 걷고, 바라보고, 느끼는 모든 순간이 이 도시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용한 감동은 여행이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가루이자와는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감정을 남기는 도시였습니다. 나는 이곳을 떠나며 다시 생각했습니다. 빛, 물질, 그리고 인간. 그 모든 것이 자연 속에서 부드럽게 스며들 때, 비로소 완전한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가루이자와는 나에게 그 조용한 진실을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