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자와는 한적하고 단정한 도시입니다. 도쿄나 오사카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그 고요함 속에 견고한 내면을 품고 있습니다. 일본 3대 정원 중 하나인 겐로쿠엔과 전통 찻집 거리 히가시차야가이, 그리고 현대적 감각이 흐르는 21세기 미술관까지, 고전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도시. 그 균형 속에서 나는 가쿠타 미쓰요의 『종이달』을 떠올렸습니다. 완벽해 보이는 일상, 하지만 그 안에 틈처럼 스며든 외로움과 균열. 이 도시의 풍경은 마치 소설 속 주인공 ‘리카’의 감정처럼, 단정한 겉모습 아래 흔들리는 내면을 닮아 있었습니다.
1. 겐로쿠엔 – 정원의 조화, 마음의 균열
겐로쿠엔은 보기 드문 정갈함을 지닌 일본식 정원입니다. 그러나 그 조화로운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의도된 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균형은 언제나 완벽함이 아니라, 어긋남을 전제로 합니다. 『종이달』 속 리카는 평범한 주부에서 은행원, 그리고 비밀을 간직한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겐로쿠엔의 돌길을 걷는 동안 나는 리카가 느꼈을 감정의 이음새를 상상해 봅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그 안엔 숨겨진 결핍과 동요가 있습니다. 이 정원은 오히려 그런 불완전함까지도 수용하며, 고요하게 그것을 감싸줍니다.
겐로쿠엔은 정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철학처럼 느껴졌습니다. 호수에 비친 소나무와 돌다리, 비틀린 나무 가지마저도 그곳에선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리카가 살았던 세계도 비슷했습니다. 겉으로는 단정한 사회, 그러나 그 틀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모순과 감정들이 눌려 있었던 구조. 겐로쿠엔은 그 모순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며 조화롭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리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정원의 돌 하나, 물결 하나에 감정을 얹었습니다. 아마 그녀는 이 정원처럼, 단정해 보이기 위해 스스로를 억눌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억눌림이 한순간, 종이처럼 찢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2. 히가시차야가이 – 전통의 골목에 숨은 진심
히가시차야가이는 가나자와의 전통 찻집 거리입니다. 나무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차를 마시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이달』의 리카는 누구보다 평범해 보였지만, 그 평범함이 누군가에게는 가면이자 탈출구였습니다. 이 거리의 고요한 풍경을 보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진짜 나’라는 건 어쩌면 특정한 장소에서만 드러나는 것 아닐까. 히가시차야가이의 어느 골목에서 나는 리카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규칙적인 공간일수록, 불규칙한 감정은 더욱 또렷해지니까요.
히가시차야가이의 골목은 깊습니다. 낮에는 관광객의 발길이 잦지만, 해가 지면 거리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집니다. 그곳에서 나는 한 오래된 찻집에 들렀습니다. 벽에 걸린 엽서, 빛이 바랜 쇼윈도, 그리고 주인장이 따라주는 말차 한 잔. 모두가 조용히 제 몫을 하는 이 풍경 속에서, 나는 '평범함'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리카에게 평범한 일상은 감옥이었습니다. 히가시차야가이처럼 정갈한 공간은 때때로 진짜 나를 가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가둠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마주할 기회도 얻지 못합니다. 골목을 걸으며 나는 그 안에서 삶의 ‘밀도’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3. 21세기 미술관 – 틀에서 벗어난 감정의 구조
21세기 미술관은 도시의 고요함 속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현대성의 상징입니다. 열린 구조, 경계 없는 전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작품들. 이곳에 들어선 순간, 리카가 겪은 감정의 이탈이 시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종이달』은 누군가의 일탈을 그리지만, 동시에 그 안에 감춰진 공허와 절실함을 보여줍니다. 이 미술관 역시 일상의 틀을 잠시 벗어나, 감정이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합니다. 정해진 답이 없는 예술처럼, 사람의 삶도 하나의 해석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이곳에서 다시 깨닫습니다.
21세기 미술관에 전시된 ‘풀(pool)’ 작품 앞에 섰을 때, 나는 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을 보았습니다. 수면 아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닿을 수 없는 구조. 『종이달』이 보여준 감정 역시 그러했습니다. 서로의 마음이 교차했지만, 결국 어떤 감정은 표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이 미술관은 감정의 은유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려 하고, 무엇을 외면하는가. 그 질문이 전시물보다도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리카가 감당하지 못했던 건, 죄책감이 아니라 그 죄마저 감싸줄 누군가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던 건 아닐까 싶습니다.
4. 구타니야키 마을 – 조각난 파편 위의 정서
가나자와 외곽에 위치한 구타니야키 도자기 마을은 찻잔 하나에도 깊은 정서가 스며든 공간입니다. 리카는 은행이라는 틀 속에서, 타인의 돈을 다루며 점점 자신의 감정을 잃어갑니다. 그러나 도자기를 빚는 손길처럼, 감정도 시간이 걸려야 비로소 형태를 갖게 됩니다. 구타니야키 마을의 가마 앞에서 나는 리카의 선택을 곱씹어보았습니다.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이곳에선 사람도, 마음도, 조각난 채로 다시 빚어집니다. 파손된 감정이 도자기처럼 유약하게 발린 채, 조용히 다시 일상을 만들어갑니다.
구타니야키 마을은 사람의 손길이 남은 공간입니다. 완벽하게 그려진 도자기에도 흠 하나쯤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흠은 오히려 작품을 살아 있게 만들었습니다. 리카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군가는 그녀를 파괴자라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인간적이라 느꼈습니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금이 가 있고, 그 금을 어떻게 감추느냐에 따라 삶의 모양이 달라집니다. 구타니야키의 장인들은 금이 간 자리에 금박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흠이 곧 아름다움이 되기까지, 시간과 손길이 필요합니다. 나도 리카의 감정이, 언젠가는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결론 – 단정한 도시, 무너질 틈마저 아름다운
『종이달』은 무너지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무너짐은 파괴가 아니라, 다른 감정으로 이어지는 틈입니다. 가나자와는 그런 틈을 품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슬퍼지는 순간이 있고, 너무 조용해서 마음의 소음이 더 커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흔들리는 마음도 하나의 모습’이라는 진실을 배웁니다. 리카는 죄를 지었지만, 동시에 진심이었습니다. 가나자와는 그 진심이 도망쳐 머물 수 있는, 조용한 은신처 같은 도시였습니다 .
결론을 조금 더 확장하자면, 가나자와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단정함 속에 깃든 진심, 침묵 속에서 울리는 감정. 리카의 선택은 사회적 잣대에선 옳지 않았지만, 그 감정은 분명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흔들리는 마음도 아름답다'는 문장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흔들리고,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그러나 그 흔들림조차 우리의 일부이죠. 종이처럼 얇은 감정 위를 걸으며, 나는 이 도시에서 내 마음의 균열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틈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회복의 시작이라는 것을, 가나자와는 조용히 가르쳐 준 곳이었습니다.